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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망상의 조각들 65

하루, 또 하루.

요 사이 힘든 일이 있었다. 그러나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했다. 그냥 버티면 언젠가는 괜찮아진다는 그 말 하나로 버티면서, 하루하루 지나가는 날짜를 헤아렸다. 하루 지났다. 닷새 버텼으니 한달도 버틸 수 있어. 그럼 일년도 지나가리라, 했다. 그런 와중에 아주 작은 문제 하나가 더해졌다. 하지만 별 것도 아닌, 되려 내 힘으로 얼마든지 해결 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 나도 모르게 펑펑 주저앉아 울고 말았다. 누가 뺨 때려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마구 울었다. 울면서도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 진작부터 나는 울고 싶었구나.. 괜찮지만은 않았구나. 하지만 눈물을 금방 그치고, 나는 또 하루를 보낸다. 그냥 그렇게 무뎌지기를, 지금이 지나가길 기다리는 수 밖에 없기에... 괜찮은 척, 다시 눈 앞에 놓인..

[코믹 연극] 뉴 보잉보잉 관람 후기 (신도림)

[연극] 뉴 보잉보잉 1탄 관람 후기(신도림 - 프라임 아트홀) 코믹연극 보잉보잉, 그 중에서도 1탄을 관람했다. (보잉보잉은 프랑스 원작인 연극을 각색한 것으로, 1, 2, 3탄까지 있는 모양. 이번에 본 연극을 '뉴보잉보잉'이라고도 하던데, 그냥 '보잉보잉'과 어떻게 다른지는 모르겠다.)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날씨에 야외로 나갈 수가 없어 급작스럽게 선택한 연극. 대학로에서도 공연 중이지만, 집에서 더 가까운 신도림을 선택! 연극 보잉보잉의 줄거리는 이렇다. 3명의 스튜어디스 여성과 문어발식 연애를 하고 있는 남자, 조성기. 3명의 여성은 모두 자신이 조성기의 유일한 애인이자 약혼자라 믿고 있는 상황이다. 스튜어디스인 여성들은 각기 자신만의 비행 스케쥴이 있었기에, 그 동안 3명과의 동시 연애를 무리..

아인슈타인의 유명한 일화 하나, 그리고 생각.

오늘, 아인슈타인의 한 일화가 떠올랐다. 내가 중학생 무렵 어떤 책에서 읽은 일화였는데, 이런 내용이었다. ◇◆◇ 아인슈타인은 어느 날 우연히 만난 한 젊은이와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아인슈타인은 그 당시에도 유명한 물리학자였지만, 젊은이는 아인슈타인이 누구인지 알아보지 못했다. 그리고 서로에 대해 모르는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어 나갔다. 그러던 중 젊은이는 아인슈타인에게 이렇게 물었다."직업이 무엇인가요?" 아인슈타인은 이렇게 대답했다. "저는 물리학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그 젊은이는 아인슈타인을 보고 매우 놀랍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 나이에 아직도 물리학을 공부한다고요? 나는 벌써 2년 전에 그것을 끝냈는데." ◇◆◇ 오만, 편협한 잣대, 같음과 다름을 옳고 그름으로 만드는 치우..

봄날, 꽃이 진다.

꽃이 피었다.내가 머물러 있는 동안에도 꽃들은 부지런했다. 그리고, 언제 겨울이었나 싶게, 추위를 까마득하게 만들며, 꽃들은 저마다 아우성치며 피어났다. 나뭇가지마다 하얀색 봄을, 분홍색 고운 봄을 주렁주렁 매달고 있다. 제 가지 크기만큼의, 제 나무 크기만큼의 봄을 짊어지고 있다. 꽃이 핀다. 그리고 꽃잎이 떨어진다. 나무 아래, 연못가에, 잔잔한 물 위에, 그리고 길가에. 아직 채 피어나지 않은 늦된 봉오리가 한창 준비를 하는 동안에도, 떨어진 꽃잎은 바람에 날리고, 밟히고, 시들고… 그렇게 사라져간다. 꽃이 핀다. 그리고 꽃이 피어나는 곳에서는, 늘 꽃이 진다.

우리 집 TV는 묵언수행 중

엄마랑 나란히 앉아 드라마를 보고 있었다. 엄마가 틀어놓은 드라마는 '천상의 약속'. 배우 이유리가 연기하는 쌍둥이 중 한 명이 죽음의 위기에 처하는, 아주 중요한 장면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소리가 뚝 하고 끊겼다. 오호라, 이런 것이 바로 방송사고겠거니, 했다. 방송 사고를 목격하다니, 흥미진진하군! 몇 초만 있으면 다시 소리가 나올 거라 기대하고 TV화면을 응시하고 있는데 여전히 고요하다.뒤늦게 다른 채널로 돌려보니 모든 채널에서 소리가 나지 않는다. TV를 껐다 켜고, 셋탑박스를 껐다 켜고, 아예 연결 선을 뺐다 꽂고... 내가 부산스레 별 시도를 다 해보는 와중에도, TV는 의연하게 묵언수행을 이어간다. 사용하고 있는 있는 인터넷 TV회사에 전화를 걸어 증상을 말하고, 기사님의 방문 약속을 잡았..

갈팡질팡 신호등

신호등 늘 걸어다니던 횡단보도 앞에 서서 오늘따라 잠시 머뭇댄다. 이 길을 건너가야 하는 걸까, 가만히 서서 때를 기다려야 하는 걸까? 신호등에 파란 불이 들어왔나 싶었는데, 빨간 덩달아 강렬하게 번쩍인다. 힘차게 걸어 가지도, 그렇다고 멈추어 서지도 못하고, 그저 제자리만 빙빙 돌고 있는… 요즘의 내 마음과 꼭 닮은 신호등.

파프리카, 여름과 가을 사이

올봄 재래시장을 지나던 길에 파프리가 모종이 눈에 띄었다. 고추와 똑같은 모습의 잎을 가졌으나 잎의 크기가 훌쩍 컸다. 노란 열매가 달린다는 파프리카 모종 두 그루를 사와 화분에 심었다. 그런데 분명 알고 있었음에도 미처 생각 못한 것이 있었으니, 고추와 같은 류라면 진딧물이 쉬이 번식하리라는 것. 예전 고추를 심었을 때 징글징글한 진딧물에 치를 떨었건만, 노랗고 탱탱한 파프리카 열매를 생각하는 순간 그 기억은 까맣게 지워지고 말았다. 그리고 아니나다를까! 날이 따스해지자 진딧물 군대가 침략해왔고, 나의 마늘액과 세제물, 우유 공격에도 굴하지 않고 파프리카를 점령했다. 패잔병이 된 기분으로, 나는 파프리카 화분을 에어컨 실외기 앞에 끌어다 놓는 것으로 소심한 복수를 했다. 비가 거세게 내려도 다 맞추고,..

오후의 산책이 만든 산딸기잼

집 근처의 산을 산책 하는 길에 산딸기가 주렁주렁 열린 곳을 발견했다. 점심 먹고 어슬렁어슬렁 나왔다가 다시 후다닥 집으로 돌아가 만반의 준비를 하고 나온다. 긴 바지에 긴팔 티, 장갑과 산딸기를 담을 봉지, 나무 막대기 하나.풀숲에 나오는 각종 벌레와 혹시 있을지 모를 뱀, 그리고 산딸기의 숱한 가시로부터 조금 안전해지기 위해서다. 그렇게 산딸기를 한참이나 따서 봉지에 담았다. 집에 가져와서 조심스럽게 산딸기를 씻어 본다.자연에서 자란 산딸기는 알이 탱탱하고 싱싱하다.선명한 산딸기 붉은 색이 태양빛을 머금었나 싶다. 씻은 그 자리에서 굵은 것으로 골라 입으로 쏙쏙 넣어본다. 새콤하고, 달콤하다. 설탕을 넣고, 레몬즙을 넣고, 산딸기 잼을 만들기로 한다. 타지 않게 계속 저어주고, 우르르 끓어올라 튀지 ..

삶이 웃음을 머금는 순간들

삶이 웃음을 머금는짧은 순간들 이름모를 들꽃 한 송이를 마주했을 때 나뭇가지 틈새로 햇빛이 비춰올 때 다람쥐가 튀어나와 인사할 것만 같은 나무 구멍을 발견했을 때 남의 집 담벼락에 장미꽃이 소담스레 피었을 때 나뭇잎 사이사이 빨간 열매가 빵긋 얼굴을 내밀 때. 무료하던 일상이 갑자기 알록달록 변하는,소소하지만 즐거운 순간순간들.

[일상] 늘 푸른 소나무, 그러나 머무르지 않는…

소나무. 사시사철 푸른색을 잃지 않는 나무. 겨우내 푸르러서 봄이 온다는 생경함마저 느끼지 않는 존재. 그러나 문득 올려다 본 나무는, 늘 보아온 익숙함 대신 새로움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새봄이 되어 훌쩍 자란 잎 가지의 끝에서는, 그 동안의 묵은 잎과는 분명 다른 색을 발하고 있었다. 그저 자신이 살아온 긴 세월에만 기대지 않고, 사시사철 푸른 그 익숙함에만 머무르지 않고, 새 봄에 소나무는 더 자랐고, 새 잎을 피웠고, 그리하여 머지 않아 다시 단단한 초록이 될, 맑은 연둣빛을 품게 되었다. 나무가 묻는 것 같다.너는 지금, 자라고 있느냐고. 그간의 세월을 차곡차곡 잘 쌓으며, 그 끝에 여전히 자라는 새 잎을 덧붙이며 살고 있느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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