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망상의 조각들

파프리카, 여름과 가을 사이

스위벨 2015. 9. 18. 23:12
반응형

올봄 재래시장을 지나던 길에 파프리가 모종이 눈에 띄었다. 

고추와 똑같은 모습의 잎을 가졌으나 잎의 크기가 훌쩍 컸다.


노란 열매가 달린다는 파프리카 모종 두 그루를 사와 화분에 심었다. 

그런데 분명 알고 있었음에도 미처 생각 못한 것이 있었으니, 
고추와 같은 류라면 진딧물이 쉬이 번식하리라는 것.

예전 고추를 심었을 때 징글징글한 진딧물에 치를 떨었건만, 
노랗고 탱탱한 파프리카 열매를 생각하는 순간 그 기억은 까맣게 지워지고 말았다.


그리고 아니나다를까!
날이 따스해지자 진딧물 군대가 침략해왔고, 
나의 마늘액과 세제물, 우유 공격에도 굴하지 않고 파프리카를 점령했다.

패잔병이 된 기분으로, 나는 파프리카 화분을 에어컨 실외기 앞에 끌어다 놓는 것으로 소심한 복수를 했다.
비가 거세게 내려도 다 맞추고, 여름 내 실외기 바람에 흔들리도록.

당연히 파프리카는 자주 꽃을 떨구었고, 진딧물 때문에 새순도 제대로 내지 못했다.



그런데 그 와중에도 살아남은 꽃 몇개에서는 열매가 달렸고, 부러 방치한 나에게 항의라도 하듯, 커갔다.

그리고 여름내내 자라던 파프리카는 모습을 바꾸었다.



처음에는 초록이 대부분이었다가, 이내 반반쯤 되었다가, 노란색이 점차 많아지는 요즘이다.
여름의 풋풋함과 가을의 풍부함을 함께 간직한 듯한 생김새.



어쩜이리 매끄럽고 탱탱한지 한참을 들여다 보았다.

네 조각으로 예쁘게 갈라진 파프리카 배꼽은 흡사 네잎클로버처럼 보이기도 한다.



나의 심술과 방치에도 불구하고, 

'그런것쯤 무에냐' 하면서 매일매일, 꼬박꼬박 성실하게 제 몫을 다한 파프리카.


파는 것보다 훨씬 작은 크기이지만, 

그 안에 영양소도 옹골차게 담아내고 있을 것만 같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