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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다반사 26

이제서야 이해되는... 그 시간.

속상한 일이 있는 날이면 엄마는 하루 종일 집안일을 했다. 아버지와 크게 싸운 날이거나, 외갓집에서 안 좋은 소식이 들려오거나, 꽤나 고약한 시어머니였던 나의 할머니가, 엄마에게 모진 소리를 했을 때. 그럴 때면 엄마는 늘 하루종일 바빴다. 더럽지도 않은 데 청소를 또 하고, 그릇을 닦았다. 커튼을 뜯어 빨고, 이불을 빨았다. 그리고 그런 날이면, 엄마의 손길은 유독 거칠었고, 소리는 더욱 시끄러워졌다. 청소기가 시끄럽게 윙윙대고, 세탁기가 웅 하고 돌아갔다. 장에 있는 온갖 그릇을 꺼내어 덜그덕거리며 내어 닦았고, 다시 덜그덕거리며 장에 정리해 넣었다. 정말 참지 못할 만큼 속이 상한 날에는, 그 그릇 중 한두어개가 깨어져 나가기도 했다. 어린 나는 그런 날이 무서웠다. 평소에도 엄한 성격이던 엄마가,..

염소를 몰던 그녀는... (소설, 염소를 모는 여자, 그리고 나)

전경린 작가의 소설 ‘염소를 모는 여자’. 그 소설 속의 주인공인 윤미소는 늘 집에서 부동산 정보를 찾아본다. 멀리 떨어진 어느 곳에 있는 집들을. 사지도 않을 거면서 늘 그렇게 어느 곳에 있다는 집을 알아보고, 어느 날은 전화를 걸어 보기도 한다. 내가 이 소설을 처음 읽은 건, 지금으로부터 10여년 전. 그때의 나는 20살 초반쯤 되었고, 사실 윤미소가 잘 이해가 되지는 않았다. 나는 그렇게 다른 곳의 집들을 찾아 보기만 하는 그녀가, 조금은 답답하고, 아둔하다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20살 무렵의 나는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았고, 무엇이든 될 수 있을 것 같았을테니.. 그러나 10여년쯤 지나고, 나이가 먹고… 어느 새 문득, 나는 내가 윤미소가 되어 있음을 깨달았다. 요즘의 나는, 그녀처럼 종..

시간이 지나간 철길을 걷다..

슬픈 일이 있었다. 누구에게는 사소할 수도 있는, 그러나 나에게는 더없이 마음 아픈.. 그런 일. 괜찮지 싶다가도 순간순간 툭툭, 마음이 내려 앉았다. 그리고는 곧 발작하듯 눈물이 쏟아졌다. 도저히 가만히 견딜 자신이 없어, 몇 가지만 간단하게 싸들고 길을 나섰다. 그리고 몇 해 전부터 한번 가봐야지 했지만 막상 가보지는 못했던... 그 곳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어느덧 나는 낯선 도시에 와 있다. 시외버스에서 내려서는 줄곧 걷고 또 걸었다. 이틀 동안, 무언가 목적의식도 없이 유명하다는 몇 곳을 찾아 다니는데, 차를 탈 생각도 없이 지도만 보고는 걸었다. 사람이 많이 모이는 관광지도 지나치고, 평소에 좋아하던 유적들이나 전시도 눈으로 슬쩍 훝고 만다.오늘은 왠지 다 흥미가 없다. 피로하다. 그렇게 걷다..

시시하고 소소하게.

왜 이렇게 정신이 없나 모르겠다. 그저 하루하루.. 눈 앞에 놓인 일들을 처리해 나가는 게 숨가쁘다. 그런데.. 분명 하루종일 바빴는데.. 막상 누워 잠에 들기 전이면, 왠지 모를 허탈한 마음도 든다. 하루하루 무던하게, 조금은 바보처럼 착실하게. 눈앞의 삶에 조급하고, 그러면서도 단조로운. 순간, 뭐 이런 시시한 인생이 있나 싶다. 나도 한때, 거창한 꿈을 안 꾼 건 아니었는데. 그저 막연하게지만, 내가 꽤 괜찮은 사람이 될 거라 믿던 시절도 있었는데. 하지만 그러다가 곧, "그래 뭐, 어때. 이런 인생도 있지."하는데, 그 맘이 너무 태연해서 되려 놀랍다. 그러자, "그런대로 괜찮나?" 싶으면서, 왠지 안도감이 든다. 시시하지만 소박하게. 아주 가끔 소소하게 웃음이 나는... 뭐, 그리 나쁘지 않을지도.

벚꽃, 봄날은 간다.

혼자 여행을 할 때, 나는 그 즈음에 마음에 든 노래 한 곡을 듣고 또 들으며 천천히 걷는 걸 좋아한다. 그래서 나는 제주도의 어느 골목길을 생각하면 "가로수 그늘 아래 서면"이 저절로 흘러 나오는 듯한 기분이 들고, 속초의 한적한 겨울 바다를 생각하면 "내일을 묻는다"가 함께 재생된다. 그렇게 한 곳의 장소, 한 때의 시간은, 한 곡의 음악과 함께 각인된다. 이번 봄, 벚꽃과 함께 걸은 음악은 "봄날은 간다". 봄꽃과 함께 듣는 그 음악은, 왠지 환하면서도 약간 슬프고, 그리우면서 가슴 뻐끈하기도 한.. 묘한 기분이 든다. "그건 아마 사람도 피고 지는 꽃처럼 아름다워서 슬프기 때문일 거야.."

층간 소음... 의도치 않게 감성 충만.

한달 전쯤, 윗집에 새로운 사람들이 이사를 왔다. 그리고 그날부터 쿵쾅쿵쾅.여러 집을 거치면서 이제껏 한번도 겪어보지 못한,어마무시한 소음과 진동이 전달되어 온다. 그래도 첫날과 둘째날은 그려려니 이해했다.이사 왔으니 오죽 정리할 것들이 많겠는가. 하지만 그로부터 일주일이 다 가도록 소리는 잦아질 줄을 모르고오히려 우리는 그들의 생활 패턴과 규칙을 파악하게 되었다. 전혀 알고 싶지 않았지만, 너무도 자연스럽게! 새벽 4시, 아침 7시, 오후 12시, 오후 5시반, 오후 9시부터 11시까지..각 타임별로 최소 30분에서 한 시간씩은 쿵쾅쿵쾅 끼익끼익..천장이 정신이 없다. 엄마가 알아보신 바로는 윗집에 신혼부부가 이사를 왔단다. 그 전에도 물론 조용한 사람들이 있었던 건 아니다.그들 전에는 20대 청년 둘..

아인슈타인의 유명한 일화 하나, 그리고 생각.

오늘, 아인슈타인의 한 일화가 떠올랐다. 내가 중학생 무렵 어떤 책에서 읽은 일화였는데, 이런 내용이었다. ◇◆◇ 아인슈타인은 어느 날 우연히 만난 한 젊은이와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아인슈타인은 그 당시에도 유명한 물리학자였지만, 젊은이는 아인슈타인이 누구인지 알아보지 못했다. 그리고 서로에 대해 모르는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어 나갔다. 그러던 중 젊은이는 아인슈타인에게 이렇게 물었다."직업이 무엇인가요?" 아인슈타인은 이렇게 대답했다. "저는 물리학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그 젊은이는 아인슈타인을 보고 매우 놀랍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 나이에 아직도 물리학을 공부한다고요? 나는 벌써 2년 전에 그것을 끝냈는데." ◇◆◇ 오만, 편협한 잣대, 같음과 다름을 옳고 그름으로 만드는 치우..

봄날, 꽃이 진다.

꽃이 피었다.내가 머물러 있는 동안에도 꽃들은 부지런했다. 그리고, 언제 겨울이었나 싶게, 추위를 까마득하게 만들며, 꽃들은 저마다 아우성치며 피어났다. 나뭇가지마다 하얀색 봄을, 분홍색 고운 봄을 주렁주렁 매달고 있다. 제 가지 크기만큼의, 제 나무 크기만큼의 봄을 짊어지고 있다. 꽃이 핀다. 그리고 꽃잎이 떨어진다. 나무 아래, 연못가에, 잔잔한 물 위에, 그리고 길가에. 아직 채 피어나지 않은 늦된 봉오리가 한창 준비를 하는 동안에도, 떨어진 꽃잎은 바람에 날리고, 밟히고, 시들고… 그렇게 사라져간다. 꽃이 핀다. 그리고 꽃이 피어나는 곳에서는, 늘 꽃이 진다.

우리 집 TV는 묵언수행 중

엄마랑 나란히 앉아 드라마를 보고 있었다. 엄마가 틀어놓은 드라마는 '천상의 약속'. 배우 이유리가 연기하는 쌍둥이 중 한 명이 죽음의 위기에 처하는, 아주 중요한 장면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소리가 뚝 하고 끊겼다. 오호라, 이런 것이 바로 방송사고겠거니, 했다. 방송 사고를 목격하다니, 흥미진진하군! 몇 초만 있으면 다시 소리가 나올 거라 기대하고 TV화면을 응시하고 있는데 여전히 고요하다.뒤늦게 다른 채널로 돌려보니 모든 채널에서 소리가 나지 않는다. TV를 껐다 켜고, 셋탑박스를 껐다 켜고, 아예 연결 선을 뺐다 꽂고... 내가 부산스레 별 시도를 다 해보는 와중에도, TV는 의연하게 묵언수행을 이어간다. 사용하고 있는 있는 인터넷 TV회사에 전화를 걸어 증상을 말하고, 기사님의 방문 약속을 잡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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