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망상의 조각들

이제서야 이해되는... 그 시간.

스위벨 2019. 6. 21. 1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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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상한 일이 있는 날이면 엄마는 하루 종일 집안일을 했다.

아버지와 크게 싸운 날이거나, 외갓집에서 안 좋은 소식이 들려오거나,

꽤나 고약한 시어머니였던 나의 할머니가, 엄마에게 모진 소리를 했을 때.

 

그럴 때면 엄마는 늘 하루종일 바빴다.

더럽지도 않은 데 청소를 또 하고, 그릇을 닦았다.

커튼을 뜯어 빨고, 이불을 빨았다.

 

그리고 그런 날이면, 엄마의 손길은 유독 거칠었고, 소리는 더욱 시끄러워졌다.

청소기가 시끄럽게 윙윙대고, 세탁기가 웅 하고 돌아갔다.

장에 있는 온갖 그릇을 꺼내어 덜그덕거리며 내어 닦았고, 다시 덜그덕거리며 장에 정리해 넣었다.

정말 참지 못할 만큼 속이 상한 날에는, 그 그릇 중 한두어개가 깨어져 나가기도 했다. 

 

어린 나는 그런 날이 무서웠다.

평소에도 엄한 성격이던 엄마가, 유난히 더 무서워지는 날이었으니까.

 

엄마가 조금도 엉덩이를 붙이지 않고 일을 만들어서 하는 와중에,

내가 조금이라도 걸거치기라도 하면, 짜증섞인 혼줄을 나야 했다.

 

그래서 그런 날, 나는 엄마가 미웠고,

조금 아둔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속이 상하면 차라리 누워서 잠을 자거나, 외출을 하지,

굳이 왜 자신을 휘몰아치며 나까지 무섭게 하나 싶었다.

 

오늘, 나는 하루 종일 바빴다.

아침 6시부터 일어나 바깥일을 보고 오전에 돌아왔다.

 

그리고 나서 온 집을 뒤집어 빨래거리를 찾아들었다.

세탁기에 넣고, 청소기를 집어들었다.

그리고는 쓰레기를 버리고 쓰레기 통을 씻어 놓고는, 욕실 청소를 했다.

 

그 후에는 작년에 넣어두었던 선풍기를 꺼내서는, 날개를 분해해 씻었다.

 

게으르게 지금까지 미뤄두었던 일들을,

그렇게 내내 해치웠다.

 

그리고 다음 일거리를 찾다가 엄마 생각이 났다.

 

아, 그날의 엄마도 이런 마음이었겠구나.

십수년이 훌쩍 지나, 생각이 든다.

 

울고 싶었던 날, 울지 않기 위해 하루 종일 집안일을 맴돌았구나.

한번 울고 나면 그대로 무너질까 무서우셨구나.

 

그런데 그 생각을 하고 나니, 갑자기 왈칵 한다.

도리도리 고개를 흔들고는, 다시 행주를 주워 들었다.

오늘, 나는 더 많은 일들을 바쁘게 해치워야 하는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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