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망상의 조각들

[나 홀로 떠난 속초 여행] 1. 속초 아바이 마을과 가을동화, 그리고 갯배

스위벨 2014. 3. 7. 1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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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홀로 떠난 속초] 1. 네 죄를 사하노라!

– 속초 아바이 마을과 가을동화, 그리고 갯배

 

 

◇ 경로 : 고속버스 터미널 – 설악대교 – 가을동화 드라마 촬영지(간이해수욕장) - 아바이 마을 – 갯배 선착장

 

 

고 3때였다. "네 죄를 사하노라" 라는, 어딘지 모르게 근질거리며, 손마디가 오그라드는 멘트를 날리며 서로를 향해 손을 뻗는 은서와 준서의 이야기, 가을동화라는 드라마가 방영 중이었던 건.

한참 공부에 심취해 무슨 드라마가 하는 중인지도 몰라야 할 그때, 나는 절절하게 가을동화에 빠져있었다.

 

[가을 동화의 한 장면 - 은서(송혜교)와 준서(송승헌)]

 

어느 날, 독서실 책상에 엎드려 자다가 벌떡 일어나서 "나 갈래."라는 말을 내뱉은 나에게, 같은 독서실에 다니던 옆 반 친구가 당황한 표정으로 물었다.

"왜? 갑자기 왜?!"

"가을 동화 볼 거야."

착실한 아이였던 내 친구는 잠시 멍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으나, 이내 고3의 본분을 망각한 나의 행동을 저지하려 시도했다.

"우리 집에서 비디오로 녹화하고 있어. 수능 끝나면 싹 다 빌려줄게." (그시절에는 IPTV, DMB가 나오는 휴대폰은 물론 없었다!)

그때 나는 결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으면서 씩 웃음 한번 지어 보이고는, 발걸음도 위풍당당하게 집으로 향했었다.

 

 

아바이 마을로 향하는 다리를 앞에 두고, 나는 그 시절의 드라마 가을동화와, 나의 별 시답지 않은 추억 아닌 추억을 떠올리고 있었다. 힘찬 발걸음으로 다리에 올라서자 짙푸른 바다가 보이기 시작했다.

 

 

푸른 동해바다, 바로 이것을 보기 위해 속초를 찾았다. 겉으로는 곧잘 무덤덤한 사람인 척하지만, 내 속에는 나조차도 쑥스러운 몇 가지 로망이 있다. 색깔로 치자면 우유가 잔뜩 섞인 분홍색이거나 하늘색이고, 질감으로 치자면 막 꺼내놓은 솜이불처럼 폭신폭신할… 그리고 그런 삶의 몇 가지 로망 중에는 바다에 대한 로망도 한 자리 떡 차지하고 있다. 그래서 나는 자주, 아주 심심치 않게 바다가 무작정 그리워진다.

 

마치 세계를 나눈 관문이라도 지나는 듯, 다리를 건너 마을을 지나 해변으로 들어서자 바다가 한층 더 가까워졌다.

 

 

누군가는 연인과, 누군가는 친구와, 그리고 누군가는 가족과 함께인 그 해변의 벤치에 오랫동안 홀로 앉아 바다를 바라보았다. 약간의 감성과 약간의 외로움, 그리고 약간의 망상이 더해진 해변은 조금은 일렁이고, 조금은 시원했으며, 그리고 얼마간의 바람이 불었다.

 

 

아바이 마을에 위치한 이 해변도 가을동화의 촬영지 중 한 곳이다. 바다를 보며 가을동화를 떠올렸고, 그 드라마 속의 사랑에 나의 지나간 사랑도 떠오르고, 그리고 일상에서는 감춰두었던, 내 마음 속의 물렁물렁한 부분이 잠시 일어나기도 했다. 혼자만의 여행이 좋은 건, 바로 이런 점이다. 혼자서 이런저런 생각을 맘껏 펼칠 시간이 있다는 것. 다만, 약간의 외로움은 추가.

 

 

해변에서 한참을 보내다 아바이 마을로 들어섰다. 바닷가 바로 옆에 자리한 마을에는 좁은 골목길이 늘어섰고, 그 골목에는 작은 집들이 옹기종기 붙어 있었다. 그리고 그들 대부분이 순대집, 혹은 생선구이집이다. 그리고 마을을 돌아 나오자, 은서네 집이 보였다. 드라마 속에서는 조그만 구멍가게였는데, 혜교 언니의 집은 어느덧 순대국밥 집이 되어 있다. 크고 그럴 듯한 간판을 떡하니 달고서.

 

 

그리고 이곳의 바로 앞에 갯배 타는 곳, 갯배 선착장이 있다.

오직 이 곳에서만 탈 수 있다는 갯배. 건너편이 빤히 보이는 가까운 거리지만, 그 공간을 이어주는 배가 없다면 건너갈 수 없는 곳이기도 하다. 지금은 아바이 마을에 다리가 생겨 육지와 다름없는 곳이지만, 예전에는 섬이어서 오로지 이 갯배로만 들고 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다리가 생긴 지금도, 가장 빠르게 육지로 옮겨가는 방법이라 여전히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다.

 

 

줄을 당겨서 움직이는 갯배는, 배를 타는 사람들이 서로서로 도와 줄을 당긴다.

마침 평일이라 갯배에는 사람이 별로 없었는데, 이곳의 주민인 듯한 한 아주머니가 배를 타자마자 자연스럽게 줄을 당기는 철제 도구를 집어 드는 걸 보고, 나도 따라 한 자리 떡 차지하고 줄을 당겨보았다. 이곳에서는 일상적일 그 갯배는, 서로서로가 부담스럽지 않을 만큼의 노동력을 보태, 육지와 육지를 연결하고 있었다. 눈앞에 보이는 가까운 거리라 배는 얼마 걸리지 않아 반대편에 도착했다.

 

 

작고 허름한 마을, 생선구이집과 순댓국집이 가득한 동네, 그리고 특별할 것 없는 동해 해변 한 자락. 누군가는 찾아왔다가 실망을 하고 갈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모든 것들은 한 사람의 기억과 함께 존재한다. 물건이나 장소, 음식이나 음악도 말이다. 그리고 지나간 드라마의 추억 한 자락을 간직한 나에게 그 작은 마을은 충분히 멋진 여행지였고, 기분 좋은 여행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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