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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 23

이제서야 이해되는... 그 시간.

속상한 일이 있는 날이면 엄마는 하루 종일 집안일을 했다. 아버지와 크게 싸운 날이거나, 외갓집에서 안 좋은 소식이 들려오거나, 꽤나 고약한 시어머니였던 나의 할머니가, 엄마에게 모진 소리를 했을 때. 그럴 때면 엄마는 늘 하루종일 바빴다. 더럽지도 않은 데 청소를 또 하고, 그릇을 닦았다. 커튼을 뜯어 빨고, 이불을 빨았다. 그리고 그런 날이면, 엄마의 손길은 유독 거칠었고, 소리는 더욱 시끄러워졌다. 청소기가 시끄럽게 윙윙대고, 세탁기가 웅 하고 돌아갔다. 장에 있는 온갖 그릇을 꺼내어 덜그덕거리며 내어 닦았고, 다시 덜그덕거리며 장에 정리해 넣었다. 정말 참지 못할 만큼 속이 상한 날에는, 그 그릇 중 한두어개가 깨어져 나가기도 했다. 어린 나는 그런 날이 무서웠다. 평소에도 엄한 성격이던 엄마가,..

염소를 몰던 그녀는... (소설, 염소를 모는 여자, 그리고 나)

전경린 작가의 소설 ‘염소를 모는 여자’. 그 소설 속의 주인공인 윤미소는 늘 집에서 부동산 정보를 찾아본다. 멀리 떨어진 어느 곳에 있는 집들을. 사지도 않을 거면서 늘 그렇게 어느 곳에 있다는 집을 알아보고, 어느 날은 전화를 걸어 보기도 한다. 내가 이 소설을 처음 읽은 건, 지금으로부터 10여년 전. 그때의 나는 20살 초반쯤 되었고, 사실 윤미소가 잘 이해가 되지는 않았다. 나는 그렇게 다른 곳의 집들을 찾아 보기만 하는 그녀가, 조금은 답답하고, 아둔하다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20살 무렵의 나는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았고, 무엇이든 될 수 있을 것 같았을테니.. 그러나 10여년쯤 지나고, 나이가 먹고… 어느 새 문득, 나는 내가 윤미소가 되어 있음을 깨달았다. 요즘의 나는, 그녀처럼 종..

눈 내리는 날. 아무것도 아닌 듯.

눈. 눈이 내린다. 아무런 소리도 없이, 그저 고요하게. 그러나 소란스러움을 감싸듯이 넓게. 오랜만에 마음이 잦아드는 기분이다. 눈의 그 고요함이, 어느새 스르륵 옮겨오기라도 한 것 처럼. 커피 한 잔을 마시고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간다. 늘상 있던 그곳인데, 늘 있던 그곳이 아니다. 눈을 밟는다. 천천히, 그러나 무게를 실어서 진득하게. 내 발자국이 남는다. 그리고는 서서히 사라진다. 아, 다행이랄까, 안심이랄까. 지워진다. 덮여간다. 아주 잔잔하게. 그런 흔적 쯤, 아무 것도 아니라는 듯.

벚꽃, 봄날은 간다.

혼자 여행을 할 때, 나는 그 즈음에 마음에 든 노래 한 곡을 듣고 또 들으며 천천히 걷는 걸 좋아한다. 그래서 나는 제주도의 어느 골목길을 생각하면 "가로수 그늘 아래 서면"이 저절로 흘러 나오는 듯한 기분이 들고, 속초의 한적한 겨울 바다를 생각하면 "내일을 묻는다"가 함께 재생된다. 그렇게 한 곳의 장소, 한 때의 시간은, 한 곡의 음악과 함께 각인된다. 이번 봄, 벚꽃과 함께 걸은 음악은 "봄날은 간다". 봄꽃과 함께 듣는 그 음악은, 왠지 환하면서도 약간 슬프고, 그리우면서 가슴 뻐끈하기도 한.. 묘한 기분이 든다. "그건 아마 사람도 피고 지는 꽃처럼 아름다워서 슬프기 때문일 거야.."

[책] 1리터의 눈물 - 눈꽃처럼 살다 간 소녀의 일기 (실화)

[책, 도서, 실화] 1리터의 눈물:눈꽃처럼 살다 간 소녀, 아야의 일기 / 키토 아야 지음 간혹 인터넷 서점에서 책을 한꺼번에 여러 권 주문할 때가 있다. 이 책 '1리터의 눈물'도 다른 책을 구매할 때 함께 사 두었던 책이다. 그런데 함께 구입한 다른 책들을 다 읽고도, '1리터의 눈물'은 꽤 오래 내 방의 책장에 꽂혀만 있었다. 왠지 책 '1리터의 눈물'을 향해 가볍게 손이 뻗어지지 않았다. 1리터의 눈물은 책을 원작으로 일본에서 영화와 드라마로도 제작되었다. 그래서 이런저런 정보를 통해 대략적인 내용은 이미 알고 있었다. 1리터의 눈물은 만들어진 가공의 이야기 아니라 실화다. 책 '1리터의 눈물'은 키토 아야라는 실제 인물이 직접 써 내려간 일기다. 책 '1리터의 눈물'과 저자 '키토 아야' 1리..

하루, 또 하루.

요 사이 힘든 일이 있었다. 그러나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했다. 그냥 버티면 언젠가는 괜찮아진다는 그 말 하나로 버티면서, 하루하루 지나가는 날짜를 헤아렸다. 하루 지났다. 닷새 버텼으니 한달도 버틸 수 있어. 그럼 일년도 지나가리라, 했다. 그런 와중에 아주 작은 문제 하나가 더해졌다. 하지만 별 것도 아닌, 되려 내 힘으로 얼마든지 해결 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 나도 모르게 펑펑 주저앉아 울고 말았다. 누가 뺨 때려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마구 울었다. 울면서도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 진작부터 나는 울고 싶었구나.. 괜찮지만은 않았구나. 하지만 눈물을 금방 그치고, 나는 또 하루를 보낸다. 그냥 그렇게 무뎌지기를, 지금이 지나가길 기다리는 수 밖에 없기에... 괜찮은 척, 다시 눈 앞에 놓인..

파프리카, 여름과 가을 사이

올봄 재래시장을 지나던 길에 파프리가 모종이 눈에 띄었다. 고추와 똑같은 모습의 잎을 가졌으나 잎의 크기가 훌쩍 컸다. 노란 열매가 달린다는 파프리카 모종 두 그루를 사와 화분에 심었다. 그런데 분명 알고 있었음에도 미처 생각 못한 것이 있었으니, 고추와 같은 류라면 진딧물이 쉬이 번식하리라는 것. 예전 고추를 심었을 때 징글징글한 진딧물에 치를 떨었건만, 노랗고 탱탱한 파프리카 열매를 생각하는 순간 그 기억은 까맣게 지워지고 말았다. 그리고 아니나다를까! 날이 따스해지자 진딧물 군대가 침략해왔고, 나의 마늘액과 세제물, 우유 공격에도 굴하지 않고 파프리카를 점령했다. 패잔병이 된 기분으로, 나는 파프리카 화분을 에어컨 실외기 앞에 끌어다 놓는 것으로 소심한 복수를 했다. 비가 거세게 내려도 다 맞추고,..

오후의 산책이 만든 산딸기잼

집 근처의 산을 산책 하는 길에 산딸기가 주렁주렁 열린 곳을 발견했다. 점심 먹고 어슬렁어슬렁 나왔다가 다시 후다닥 집으로 돌아가 만반의 준비를 하고 나온다. 긴 바지에 긴팔 티, 장갑과 산딸기를 담을 봉지, 나무 막대기 하나.풀숲에 나오는 각종 벌레와 혹시 있을지 모를 뱀, 그리고 산딸기의 숱한 가시로부터 조금 안전해지기 위해서다. 그렇게 산딸기를 한참이나 따서 봉지에 담았다. 집에 가져와서 조심스럽게 산딸기를 씻어 본다.자연에서 자란 산딸기는 알이 탱탱하고 싱싱하다.선명한 산딸기 붉은 색이 태양빛을 머금었나 싶다. 씻은 그 자리에서 굵은 것으로 골라 입으로 쏙쏙 넣어본다. 새콤하고, 달콤하다. 설탕을 넣고, 레몬즙을 넣고, 산딸기 잼을 만들기로 한다. 타지 않게 계속 저어주고, 우르르 끓어올라 튀지 ..

삶이 웃음을 머금는 순간들

삶이 웃음을 머금는짧은 순간들 이름모를 들꽃 한 송이를 마주했을 때 나뭇가지 틈새로 햇빛이 비춰올 때 다람쥐가 튀어나와 인사할 것만 같은 나무 구멍을 발견했을 때 남의 집 담벼락에 장미꽃이 소담스레 피었을 때 나뭇잎 사이사이 빨간 열매가 빵긋 얼굴을 내밀 때. 무료하던 일상이 갑자기 알록달록 변하는,소소하지만 즐거운 순간순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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