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경린 작가의 소설 ‘염소를 모는 여자’. 그 소설 속의 주인공인 윤미소는 늘 집에서 부동산 정보를 찾아본다. 멀리 떨어진 어느 곳에 있는 집들을. 사지도 않을 거면서 늘 그렇게 어느 곳에 있다는 집을 알아보고, 어느 날은 전화를 걸어 보기도 한다.
내가 이 소설을 처음 읽은 건, 지금으로부터 10여년 전. 그때의 나는 20살 초반쯤 되었고, 사실 윤미소가 잘 이해가 되지는 않았다. 나는 그렇게 다른 곳의 집들을 찾아 보기만 하는 그녀가, 조금은 답답하고, 아둔하다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20살 무렵의 나는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았고, 무엇이든 될 수 있을 것 같았을테니..
그러나 10여년쯤 지나고, 나이가 먹고… 어느 새 문득, 나는 내가 윤미소가 되어 있음을 깨달았다. 요즘의 나는, 그녀처럼 종종 부동산 정보를 찾아본다. 인터넷 창을 열고 클릭만하면, 멀리 제주, 속초, 남해… 멀리 떨어진 어느 마을의 부동산 정보도 그냥 책상 앞에 앉아 볼 수 있다. 더욱이, 요즘은 그 집앞의 길도, 풍경도, 생생히 볼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
나는 바닷가 근처에 위치한 집들을 살펴본다. 가격은 얼마인지, 위치는 어떤지, 바다와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 그저 찾아만 볼뿐이다. 이런 곳에 살면 좋겠다, 어느 날 훌쩍, 떠날 수 있으면 좋겠다, 그런 막연한 바람만으로. 하지만 나에겐 아직 계획도, 결심도 없다. 내 현실은 그리 관대하지 않다는 것이, 그 핑계다.
"언제까지 벼랑 끝에 배를 붙이고 심연을 내려다보고 있을 수는 없다. 나아가기 위해서는 끊긴 길 앞에서 두 눈을 감고, 뒤 귀도 닫고 자신의 본질을 향해 어느 순간 훌쩍 뛰어내리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뛰어내려본 사람은 알게 될 것이다. 있는 것과 없는 것 사이의 심연 속에 현실보다, 현실의 현실보다도 더 강한 구름의 다리가 있다는 것을." (전경린, 염소를 모는 여자 中)
소설 속 윤미소는 결국 뛰어 내렸다. 훌쩍. 검은 박쥐 우산을 들고 염소를 모는, 흔히들 말하는 '현실감 없는' 모습으로. 그 후에 그녀가 어찌 되었는지는, 물론 알 수 없다. 우리가 아는 윤미소의 이야기는 거기까지니까.
책에 따르면, 나는 여전히 배를 깔고, 심연을 내려다보고 있는 중인지도 모른다. 앞으로 가야 할지, 심지어 되돌아가야할지 아무런 결정도 못한 채로 말이다. 나는 저 밑에 구름다리가 있다는 것을 믿지 않고 있다. 내 눈에 구름다리는 보이지 않는다. 겁이 난다. 떨어지면, 그 알 수 없는 어둠에 삼켜질 것만 같다.
내가 그 심연으로 뛰어내릴 수 있는 날이 있을까? 배를 깔고 아래를 내려다보는 것이 지치면, 어느 날에는 갑자기 일어나서, 앞으로 나아가기를 포기하고 왔던 길을 되돌아가게 될 지도 모를 일이다. 물론 어쩌면, 무엇에라도 홀린 듯 갑작스레 훌쩍, 뛰어내리기로 결심할 지도 모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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