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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망상의 조각들 65

이제서야 이해되는... 그 시간.

속상한 일이 있는 날이면 엄마는 하루 종일 집안일을 했다. 아버지와 크게 싸운 날이거나, 외갓집에서 안 좋은 소식이 들려오거나, 꽤나 고약한 시어머니였던 나의 할머니가, 엄마에게 모진 소리를 했을 때. 그럴 때면 엄마는 늘 하루종일 바빴다. 더럽지도 않은 데 청소를 또 하고, 그릇을 닦았다. 커튼을 뜯어 빨고, 이불을 빨았다. 그리고 그런 날이면, 엄마의 손길은 유독 거칠었고, 소리는 더욱 시끄러워졌다. 청소기가 시끄럽게 윙윙대고, 세탁기가 웅 하고 돌아갔다. 장에 있는 온갖 그릇을 꺼내어 덜그덕거리며 내어 닦았고, 다시 덜그덕거리며 장에 정리해 넣었다. 정말 참지 못할 만큼 속이 상한 날에는, 그 그릇 중 한두어개가 깨어져 나가기도 했다. 어린 나는 그런 날이 무서웠다. 평소에도 엄한 성격이던 엄마가,..

눈 내리는 날. 아무것도 아닌 듯.

눈. 눈이 내린다. 아무런 소리도 없이, 그저 고요하게. 그러나 소란스러움을 감싸듯이 넓게. 오랜만에 마음이 잦아드는 기분이다. 눈의 그 고요함이, 어느새 스르륵 옮겨오기라도 한 것 처럼. 커피 한 잔을 마시고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간다. 늘상 있던 그곳인데, 늘 있던 그곳이 아니다. 눈을 밟는다. 천천히, 그러나 무게를 실어서 진득하게. 내 발자국이 남는다. 그리고는 서서히 사라진다. 아, 다행이랄까, 안심이랄까. 지워진다. 덮여간다. 아주 잔잔하게. 그런 흔적 쯤, 아무 것도 아니라는 듯.

기억의 무게

한동안 마음이 몹시도 부대꼈다. 목구멍에서 넘어가지 않는 질기고 끈끈한 무언가처럼, 그것은 내 숨을 탁탁 막아댔다. 소용돌이가 친다. 현재의 기억은, 과거를 줄줄이, 마치 어제 일인 것처럼 불러온다. 그리고는 마음을 한껏 휘저어 슬픔이 일렁이게 만들었다가, 머릿속을 돌고돌아 분노가 솟아오르게 했다. 누군가는 말하겠지. "그건 이미 지나간 과거잖아." 하지만 나는 울부짖는다. "여전히 그 상처가 아픈 나에게는, 아직 현재야." 과거의 시간부터... 아물지 못하고 같은 자리에 계속 몇 번이고 상처가 나는 탓에, 내 상처는 점점 깊이 후벼파이고, 짓무르고, 더 넓어진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이 지금 살짝 할퀴고 간, 딱 그 만큼의 상처뿐인줄 안다. 그래서 내 눈물과 내 분노는... 그들에게는 우습도록 과하고,..

시간이 지나간 철길을 걷다..

슬픈 일이 있었다. 누구에게는 사소할 수도 있는, 그러나 나에게는 더없이 마음 아픈.. 그런 일. 괜찮지 싶다가도 순간순간 툭툭, 마음이 내려 앉았다. 그리고는 곧 발작하듯 눈물이 쏟아졌다. 도저히 가만히 견딜 자신이 없어, 몇 가지만 간단하게 싸들고 길을 나섰다. 그리고 몇 해 전부터 한번 가봐야지 했지만 막상 가보지는 못했던... 그 곳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어느덧 나는 낯선 도시에 와 있다. 시외버스에서 내려서는 줄곧 걷고 또 걸었다. 이틀 동안, 무언가 목적의식도 없이 유명하다는 몇 곳을 찾아 다니는데, 차를 탈 생각도 없이 지도만 보고는 걸었다. 사람이 많이 모이는 관광지도 지나치고, 평소에 좋아하던 유적들이나 전시도 눈으로 슬쩍 훝고 만다.오늘은 왠지 다 흥미가 없다. 피로하다. 그렇게 걷다..

왜냐고 묻기 시작하면...

시애틀의 잠못 이루는 밤 이라는 영화를 참 좋아한다. 너무나 예쁜 맥 라이언과 젊은 날의 톰 행크스가 보여주는 운명적인 사랑 이야기. 사랑은 마법이라고 외치는 그 달콤한 영화에서, 내 마음에 또렷이 남은 장면과 대사는 좀 의외라고 할 수 있다. 영화는 장례식 장면에서부터 시작한다. 남자 주인공의 아내이자, 어린 아들의 엄마, 사랑스러웠던 한 여자의 장례식. 검은 상복을 입고 아빠는 어린 아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엄마는 아팠어. 그냥 갑자기 그런 일이 벌어졌지. 그 누구도 어쩔 수가 없었어. 정당하진 않아. 이유도 없고. 하지만 왜냐고 묻기 시작하면, 우린 미쳐버리고 말 거야." "If we start asking why, we'll go crazy." 어쩔 수 없는 비극 앞에 선 한 사람의 무기력함과 ..

불행과 실패의 사나이.

불운과 실패로 가득했던, 한 남자의 이야기 인생에서 수 많은 실패와 불행을 경험해야 했던 한 남자가 있다. 그가 겪어야 했던, 굵직한 불행과 실패의 이력은 다음과 같다. 15세, 집을 잃고 길거리로 쫓겨나는 신세가 되었다. 23세, 사업에 실패했다. 24세, 주 의회 선거에서 낙선했다. 25세, 사업에 실패하며 파산했다. 이때 생긴 빚을 갚느라 17년 동안 고생해야 했다. 26세, 약혼자가 갑작스럽게 죽었다. 28세, 신경쇠약으로 결국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30세, 주 의회 의장직 선거에 출마했다가 패배했다. 32세, 정부통령 선거위원에 출마했다가 패배했다. 35세, 하원의원 선거에 출마했다가 낙선했다. 36세, 하원의원 선거 공천에서 탈락했다. 40세, 하원의원 재선거에서 낙선했다. 47세, 상원의..

시시하고 소소하게.

왜 이렇게 정신이 없나 모르겠다. 그저 하루하루.. 눈 앞에 놓인 일들을 처리해 나가는 게 숨가쁘다. 그런데.. 분명 하루종일 바빴는데.. 막상 누워 잠에 들기 전이면, 왠지 모를 허탈한 마음도 든다. 하루하루 무던하게, 조금은 바보처럼 착실하게. 눈앞의 삶에 조급하고, 그러면서도 단조로운. 순간, 뭐 이런 시시한 인생이 있나 싶다. 나도 한때, 거창한 꿈을 안 꾼 건 아니었는데. 그저 막연하게지만, 내가 꽤 괜찮은 사람이 될 거라 믿던 시절도 있었는데. 하지만 그러다가 곧, "그래 뭐, 어때. 이런 인생도 있지."하는데, 그 맘이 너무 태연해서 되려 놀랍다. 그러자, "그런대로 괜찮나?" 싶으면서, 왠지 안도감이 든다. 시시하지만 소박하게. 아주 가끔 소소하게 웃음이 나는... 뭐, 그리 나쁘지 않을지도.

벚꽃, 봄날은 간다.

혼자 여행을 할 때, 나는 그 즈음에 마음에 든 노래 한 곡을 듣고 또 들으며 천천히 걷는 걸 좋아한다. 그래서 나는 제주도의 어느 골목길을 생각하면 "가로수 그늘 아래 서면"이 저절로 흘러 나오는 듯한 기분이 들고, 속초의 한적한 겨울 바다를 생각하면 "내일을 묻는다"가 함께 재생된다. 그렇게 한 곳의 장소, 한 때의 시간은, 한 곡의 음악과 함께 각인된다. 이번 봄, 벚꽃과 함께 걸은 음악은 "봄날은 간다". 봄꽃과 함께 듣는 그 음악은, 왠지 환하면서도 약간 슬프고, 그리우면서 가슴 뻐끈하기도 한.. 묘한 기분이 든다. "그건 아마 사람도 피고 지는 꽃처럼 아름다워서 슬프기 때문일 거야.."

층간 소음... 의도치 않게 감성 충만.

한달 전쯤, 윗집에 새로운 사람들이 이사를 왔다. 그리고 그날부터 쿵쾅쿵쾅.여러 집을 거치면서 이제껏 한번도 겪어보지 못한,어마무시한 소음과 진동이 전달되어 온다. 그래도 첫날과 둘째날은 그려려니 이해했다.이사 왔으니 오죽 정리할 것들이 많겠는가. 하지만 그로부터 일주일이 다 가도록 소리는 잦아질 줄을 모르고오히려 우리는 그들의 생활 패턴과 규칙을 파악하게 되었다. 전혀 알고 싶지 않았지만, 너무도 자연스럽게! 새벽 4시, 아침 7시, 오후 12시, 오후 5시반, 오후 9시부터 11시까지..각 타임별로 최소 30분에서 한 시간씩은 쿵쾅쿵쾅 끼익끼익..천장이 정신이 없다. 엄마가 알아보신 바로는 윗집에 신혼부부가 이사를 왔단다. 그 전에도 물론 조용한 사람들이 있었던 건 아니다.그들 전에는 20대 청년 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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