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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가시고백 - 김려령 : 가시를 뽑아낸 자리, 튼튼한 새살이 돋기를.

스위벨 2014. 4. 12. 0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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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가시고백 – 가시를 뽑아낸 자리, 튼튼한 새살이 돋기를.

/ 김려령 지음

 

 

 

    줄거리    

 

자신이 '타고난 도둑'이라 생각하는 고등학교 남학생 해일이 있다. 평소에 보여주는 천진하고 맑은 웃음과는 달리, 그는 정말 눈깜짝할 사이에 무언가를 훔쳐낸다.

그리고 그는 같은 반 여학생인 지란이 사물함에 넣어둔 전자수첩까지 훔쳐내기에 이른다. 딱히 가지고 싶은 것도 아니었으면서.

 

그러던 어느 날, 해일은 부모님의 질문에 아무렇게나 둘러댄 대답, '유정란으로 병아리 부화시키기'를 직접 실행에 옮기기로 한다. 그리고 해일은 부화시킨 병아리를 매개로 삼아, 선생님과 대화를 나누고, 같은 반 진오, 지란과 가까워진다.

 

하지만 그런 시간을 통해 점차 지란이 속에 감추어진 아픔을 알아가고, 자신이 훔친 물건이 가지고 있던 이야기를 알게 되면서, 그리고 진오가 얼마나 괜찮은 아이인지를 알게 되면서, 해일은 자신이 훔쳐냈던 그 전자사전이, 그리고 이제껏 해온 도둑질이 따끔따끔 아프다.

 

 

 

 

 

상처를 보듬어줄 사람

 

해일은 도둑질이 손에 익은 아이다. 물건이 갖고 싶은 것도 아니고, 그 돈을 어떻게 써야 되는지도 모르면서, 그저 훔쳐낸다. 그리고 이제는 그것이 너무 익숙한 습관이 되어버렸다.

 

지란에게는 두 명의 아버지가 있다. 지란이 도둑맞은 전자수첩은, 난생 처음 새 아빠에게 응석을 부리며 빌린 물건이었다. 하지만 도둑맞은 일을 계기로 다시금 새 아빠와 서먹해졌다. 그리고 그건 친 아빠에 대한 원망과 미움이 폭발하는 계기가 된다.

 

진오는 입이 걸걸한 아이다. 쌍시옷 들어가는 욕은 아니지만, 비속어가 난무하는 화법을 구사한다. 그러나 그 말로, 정말 누군가를 찌르거나 상처 주지는 않는다.

 

이야기 속 주인공들은 모두 문제를 안고 있다. 도둑놈 해일, 부모님 때문에 아픈 지란, 욕쟁이 진오. 하지만 그 한 가지 문제만 제외하고는 얼마나 아름다운 아이들인지 모른다. 병아리의 탄생을 기뻐하는 순수함을 지녔고, 서로의 비밀을 지켜주는 의리를 지녔으며, 그럼에도 친구의 잘못을 단호하게 경고할 줄 아는 바름을 지녔다.

 

하지만 만약, 그들이 만난 것이 서로가 아닌, 얄팍하고 세속적인 잣대를 가진 다른 이들이었다면 어땠을까? 아마 그들의 가시는 오래도록 가슴에서 뽑히지 못했을 것이고, 상처는 영영 봉합되지 못했을 것이다. 단순히 문제아로 취급되며, 점점 더 어두운 곳으로 밀려났을 것이다. 그들 곁에, 서로가 있어서 참 다행이었다.

 

 

 

내 안에 존재하는 거울

 

소설 속에는 거울에 대한 이야기가 중요하게 나온다. 해일의 도둑질을 지켜보고 있었던 진오의 거울과 반장 다영이의 거울, 그리고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말해주는, 백설공주 속 왕비의 거울.

 

"사람마다 왕비의 거울이 있다는 거 혹시 알고 있나? 거울이 지목하면 곧장 달려가서 독사과를 먹이는 사람이 있어. 공주를 죽인다고 자기가 공주가 되는 것도 아닌데 말이지. 그걸 왕비도 알아. 그런데 왜 자꾸 죽이려고 할까? 그냥 눈꼴신 거지.

하여간 왕비의 거울이 자기의 내면의 거울이라는 거다. 자기가 묻고 자기가 대답하는 거야. 그러니까 거울이 남을 지목하면 독사과를 먹일 게 아니라, 왜 그런지 생각해 봐야 한다는 거다. 자만심과 자존심은 격이 다르다."

 

똑같은 거울을 가지고도, 그 거울이 똑같은 장면을 비추어도, 그 장면을 보는 방식은 각자의 내면에 따라 다르다. 그걸 좋은 쪽으로 볼 줄 아는 것. 남을 해하는 방식이 아니라, 자신이 성장하는 방식으로, 타인을 보듬는 방식으로 볼 줄 아는 것.

 

 

 

가시를 뽑아야, 상처도 아물 수 있다.

 

무언가 문제를 가진, 그러나 충분히 어여쁘고 맑게 변화할 수 있는 아이들, 책은 그들의 문제를 부드럽게 보듬는다. 노란 병아리의 탄생과 그들의 성장을 두근거리며 바라보는 소설 속의 아이들처럼, 소설은 그렇게 아이들을 바라보고 있다.

 

그러나 등장인물 중 딱 한 명, 구원을 받지 못한 인물이 있다. 그건 모든 이들의 약점을 들추고, 겉만 번드르한 말로 줄곧 누군가를 짓밟는 '미연'이다.

미연이 구원받지 못하는 이유는 한 가지다. 그녀 자신이 가시를 뽑을 생각이 없기 때문이다. 그녀의 내면은 누군가에게 용서를 구하지 않고, 자기행동에 대해 죄책감도 없으며, 그런 행동을 앞으로도 줄기차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아이에게 먼저 이해해주겠다, 먼저 용서해주겠다 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자신의 가시를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용기를 내야 한다. 그래야만, 그 아픈 자리에도 새살이 돋을 수 있다.

 

◇◆◇

 

<완득이>, <우아한 거짓말>을 쓴 김려령 작가의 소설이다. 이전 작품들에서 보여주었듯, 아픈 청소년들을 따뜻하게 감싸 안는 시선과 재기 넘치는 표현들은 여전하다.

그러나 약간 아쉬운 점도 있었다. 정확한 비율로 잘 빚어낸 인물들은 오히려 조금 멀게 느껴졌고, 책 전체를 뒤덮는 통통 튀는 문체는 다소 과장된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김려령의 힘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내가 생각하는 김려령 소설의 힘은 아주 재미있다는 것, 그리고 단순히 그 재미에서 끝나지 않고, 여운이 길게 남는 메시지를 담아내고 있다는 점이다. 나는 다 읽은 책의 부분부분을 다시금 들춰 보면서도, 책 속 아이들의 모습에 또 웃었고, 또 흐뭇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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