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살인자의 기억법 – 나를 둘러싼 모든 것들의 배신
/ 김영하 지음
줄거리
한 연쇄살인범이 있다. 그는 과거 많은 사람들을 살해했다. 그에게는 딸 '은희'가 있다. 친딸은 아니다. 은희는 그가 과거에 죽인 여자의 아이였다. 여자는 그에게 아이만은 살려달라 애원했고, 살인자는 그러겠노라고 약속했다. 그리고 그 약속을 지키며, 자신의 딸로 키워냈다.
그래서 25년 간 살인을 하지 않고 지냈고, 공소시효도 지나갔다. 그는 이제 70 노인이 되었다. 그리고 알츠하이머 진단을 받았다.
그는 사라지는 자신의 기억을 붙잡아 두기 위해 모든 일을 종이에 적고, 녹음을 한다. 그러나 그걸로 해결되지 않는다. 잠시 제정신이 돌아왔을 때도, 과거에 자기가 적어놓은 것이 무슨 소리인지 알지 못하는 것들이 많다.
그런 그 앞에 한 남자가 나타났다. 이름은 '박주태'. 그와 교통사고가 나던 날, 노인은 똑똑히 보았다. 그의 차 트렁크에서 뚝뚝 떨어지는 피를. 짐승은 짐승을 알아본다고 했던가. 노인은 박주태가 최근 그 주변에서 벌어지고 있는 연쇄 살인의 범인임을 직감한다.
그런데 이상하다. 그가 자신의 주변을 빙빙 돈다. 아니, 그가 아니라 딸 은희의 주변이다. 아무래도 그가 다음 희생양으로 노리고 있는 것은, 자신의 딸 은희가 분명하다.
"무서운 건 악이 아니오. 시간이지.
아무도 그걸 이길 수가 없거든."
살인마, 그리고 살인마
무자비한 살인자였던 남자가, 이번에는 자신의 딸을 지키기 위해 다른 살인자에게 맞선다. 수 많은 사람을 죽인 살인자가 이번엔 도리어 무언가 지키려고 하는, 참 아이러니한 상황이다.
그런데, 노인은 치매에 걸렸다. 그 깜빡 거리는 기억에 맞서야 하고, 딸을 해하려는 남자에게 맞서야 한다. 딸을 지키기 위해서는 자신이 먼저 박주태를 살해해야 한다. 하지만 알츠하이머가 문제다. 그는 자꾸 깜빡 잊어버리고, 박주태를 직접 만나도 누구인지 못 알아 볼 때도 있다. 그러다 한참이 지난 다음, 자신이 적어둔 것을 보고 불현듯 기억이 되살아 나곤 한다.
과거 살인자였던 치매 노인, 그리고 현재 그의 딸을 노리는 살인자. 그 기이하고 신선한 상황은 책을 읽기도 전에 책의 결말이 궁금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이내 책은 빠른 속도와 재미로 독자를 휘몰아쳤다. 그러더니 날아오른 절정의 순간, 매몰차게 떨어뜨려 버린다. 역시, 김영하다.
기억이 만들어낸 거대한 함정
책은 1인칭이다. 간결한 문장이 가뿐한 한 단락을 만든다. 길지 않은, 노인의 메모와 같이 느껴지는 잠시의 기억과 같은 짧은 글들이 이어져 하나의 소설을 완성한다. 그 산뜻한 호흡과 더불어 자꾸만 궁금해지는 뒷이야기에, 책은 술술 읽어져 나간다.
그런데 치매 노인의 시점에서 이루어지는 서술을 죽 따라가다 보면, 몇 가지 상황에 대한 이상한 점들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눈치 빠른 독자라면 그때부터 살짝 의심이 시작될 것이다. 치매 노인이 하고 있는 서술, 책 속 화자인 그가 하고 있는 이야기들을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에 대해서.
그리고 어느 순간, 모든 것이 한꺼번에 뒤집어지는 지점이 발생한다. 알고 있던 모든 것들의 전복. 안다고 생각했던 모든 것, 사실이라 생각했던 모든 것이 갑자기 모두 안개 속에 갇혀 버린다. 무언가 숨어 있을 거라는 사실을 살짝 눈치채고 있었더라도, 역시 마주한 상황이 놀라웠다.
당신의 기억에 묻는다
치매에 걸린 살인자는, 자신의 기억이 가져다 준 무자비한 조롱을 마주하게 된다. 모든 이는 노인에게 그가 알던 것과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한다.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그 모두가 치매노인의 착각이 일으킨 일들처럼 보인다.
하지만, 단순히 그렇게 치부할 수 없게 만든다. 치매 노인의 말을 전부 믿을 수는 없다. 그런데 노인이 의심하던 다른 이들, 그들의 말은 전부 사실로 받아들일 수 있는가? 치매 노인의 기억과, 타인의 말, 그 속에서 진실을 찾아낼 수 있을까?
그리고 더불어, 내가 보고 있는 것이 사실인지, 내가 기억한 것들이 진실인지, 과연 치매에 걸리지 않은 우리는 정확히 알 수 있느냐고 묻는다. 소설이 던져준 충격에 연이어 흘러나온 그 물음에, 나는 그저 긴 침묵으로 답할 수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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