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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우아한 거짓말 - 빨간 털실에 숨겨진 슬픈 인사

스위벨 2014. 3. 3.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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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우아한 거짓말 (영화 '우아한 거짓말' 원작 소설)

- 빨간 털실에 숨겨진 슬픈 인사

 

: 김려령 지음 / 창비 청소년문학

 

 

 

소설은 이렇게 시작한다.

 

내일을 준비하던 천지가, 오늘 죽었다.

 

중학교 1학년 '천지'가 죽었다. 어느 날 아침, 갑자기 평소와 다르게 떼를 쓰더니, 엄마가 출근하고, 언니가 주번이라 먼저 학교에 간 사이에 자살을 택했다. 내일을 살아야 했던 아직 어린 천지는, 그렇게 생을 자기 손으로 마무리 지었다.

 

 

 다섯 개의 털실 뭉치

 

천지가 떠나고 언니 '만지'는 동생이 남겨준 털실 뭉치 속에서 편지를 발견한다. 동생이 죽기 전 남긴 마지막 편지에는 사랑한다는 말이 적혀 있었다. 그리고 만지의 것은 '다섯 번째 봉인 실 중 그 두 번째' 였다.

 

엄마에게도 편지를 남겼고, 그것이 첫 번째라는 것을 알게 된 만지는 나머지 세 개의 털실 뭉치와, 그 속에 담긴 천지의 마음을 찾으려 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화연이와 반 아이들이 천지에게 저질렀던 일들을 알게 된다. 대놓고 폭력을 행하지는 않았으나, 화연은 교묘한 말과 선입견을 조장해 아이들을 조종했고, 천지를 감정적으로 철저하게 고립시켰다. 그건 그 무엇보다 잔인하고 비열한 방법이었다. 아이들은 착한 쳔지를 쉬이 여겼고, 돈 잘 쓰는 화연이를 적으로 돌리느니, 천지를 함께 비웃는 편을 택했다.

 

 

힘 없는 아이가 할 수 있는 단 한 가지

 

상황을 바꿀만한 힘이 없는 천지는, 농락당하는 걸 알면서도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천지는 뜨개질을 했다. 붉은 털실을 그저 넓게 넓게만 짰다. 무엇을 짜겠다는 생각도 없이, 그저 손을 놀려 자신의 허물어진 마음을 그렇게라도 짜 올리고 싶었다는 듯.

 

하지만 도저히 더는 참을 수 없는 수준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마음먹고 화연에게 마지막 승부수를 던졌다. 국어시간 숙제를 이용해서. 그런데 그 일은 오히려 반 전체의 비웃음이 되어 다가왔다. 화연이의 편리한 거짓말에 줄 서, 천지에게 뒤끝 있는 아이라며 한마디씩 했다.

 

아이들은 화연이가 뒤끝이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 나는 아니라고 합니다. 활을 쏜 사람한테 뒤끝이 있을 리가요. 활을 쏴서 미안하다고 사과를 질질 흘리고 다니는 사람, 아직 못 봤습니다. 아이들은 과녁이 되어 몸 깊숙이 박힌 활이 아프다고 한 제게 뒤끝을 운운합니다. 참고 인내해야 하는 건 늘 당한 사람의 몫인지요.

 

도저히 그 상황을 바꿀 힘이 없었던 천지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하기로 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자기 자신에 관한 일뿐이었다. 그래서 천지는 넓게 뜨던 붉은 털실을 풀어, 굵은 줄을 뜨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털실을 의지해 세상을 떠났다.

 

 

 

 

우아한 거짓말

 

화연은 그 잔인한 세 치 혀로 천지의 삶을 잔인하게 들쑤셨다. 의도를 뻔히 알면서도 동조하는 비겁한 반 아이들도. 그리고 철저하게 방관자였던 미라의 '아는 척'도 마찬가지였다.

 

아빠 없이 두 딸을 키워내야 하는 억척 엄마와 언니 만지도, 웃는 천지의 곁모습만을 보았다. 엄마도, 언니도 '착한 아이니까, 알아서 잘 하는 똑똑한 아이니까' 했다. 괜찮다는 천지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었다.

 

그런 엄마와 언니의 바람대로 천지는 착한 딸이고자 했고, 학교에서도 공부 잘하는 우등생으로 남기 위해 애를 썼다. 아이들의 괴롭힘에는 아무렇지 않은 척 당당하게 행동했으나, 그럴수록 더 깊이 곪아갔다.

 

모두가 한 우아한 거짓말이 천지를 점점 궁지로 몰았고, 천지 자신의 거짓말도 그에 보태졌다.

 

 

남은 자들이 져야 할, 책임의 무게

 

일부러 내내 씩씩하던 엄마에게는 아무도 모르는 속사정이 있었다. 벌써 몇 년 전, 천지의 엄마는화연이의 행동을 알고 그 부모에게 저지해줄 것을 부탁했다. 그러나 바쁜 화연의 부모는 '아직 아이'라는 변명 뒤에 자식을 감추어 두고, 크면 나아질 거라고만 했다.

 

그래서 천지가 떠난 후 엄마는 일부러 화연의 가족이 사는 아파트로 이사했고, 화연의 부모님이 하는 중국집에 가서 자장면을 먹는다. 천지가 죽을 만큼 먹기 싫다던 그 자장면을, 먹고 나서 다 게워낼 거면서도 일부러 가서 꾸역꾸역 먹는다. 계속 화연의 가족 주변을 맴돌며 그들이 천지를 잊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그리고 화연의 부모에게 이렇게 말한다.

 

"사과하실 거면 하지 마세요. 말로 하는 사과는요, 용서가 가능할 때 하는 겁니다. 받을 수 없는 사과를 받으면 억장에 꽂힙니다. 더군다나 상대가 사과 받을 생각이 전혀 없는데 일방적으로 하는 사과, 그거 저 숨을 구멍 슬쩍 파놓고 장난치는 거예요. 나는 사과 했어, 그 여자가 안 받았지. 너무 비열하지 않나요?"

 

천지는 그 누구보다 용서를 바랐다. 그러나 화연은 용서받을 기회조차 영원히 잃었다. 천지를 떠나 보낸 모두에게는 각자의 책임이 있고, 각자가 져야 할 무게가 있다. 천지의 엄마와 언니는 물론이요, 가해자인 화연이와 그 부모 또한 평생 천지를 등에 업고 살아야 한다. 영원히 찾지 못할, 천지의 마지막 털실 뭉치를 찾으려 애쓰면서.

 

 

◇◆◇

 

[영화 - 우아한 거짓말]

 

 

책은 시종일관 밝음과 미소를 잃지 않는다. 그러나 겉으로는 웃음기 잔뜩 머금고 있는 책의 문장들은, 그 말의 속내를 알아챌 때마다 마음을 콕콕 찔렀다. 그리고 책을 내려놓자 무언가 묵직하게 얹힌 느낌이 들었고, 코끝이 시렸다. 우리나라 어느 학교에나 여전히 몇 명씩은 있을 천지가, 혹은 이미 스러져간 아까운 여러 명의 천지가 생각났다.

 

 

아이들이 읽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잔인한 화연이가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자신의 상처를 잠시 잊기 위해, 남의 가슴팍을 찢어내는 아이들이 아니기를 바란다. 치졸한 동조자가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한 아이의 괴로움에 낄낄 웃기만 하는, 비겁한 예비살인자가 아니었으면 좋겠다.

 

부모들이 읽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무책임한 부모가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자신의 아이를 비겁한 화연이가 되도록, 속으로만 아픔을 쌓는 천지가 되도록 방치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부모의 얄팍한 변명이, 누군가를 죽음으로 몰고간 아이의 잘못을 '단순한 장난'으로 뒤바꾸곤 한다. 하지만 지금 당장 피한다고, 학교 폭력의 가해자인 자기 자식만은 올바로 살아갈 수 있으리라 착각하지 않았으면 한다.

 

어른들이 읽었으면 좋겠다. 아이들이 어른들의 부조리와 치졸함을 그대로 답습하며 자라나게 만들지 않아야 한다. 아이들의 그릇됨 이면에, 어른들이 꾸민 세상의 잔인함과 폭력이 존재한다는 걸 깨달았으면 좋겠다. 우리 사회가 더 이상은 아이들의 문제라 치부하고 방조하지 않아야 한다. 아이들의 그릇된 행동이 '잔혹한 폭력'임을 명백히 알려주어야 한다.

 

더 이상의 천지는 없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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