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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28 - 정유정 : 극한 상황에 던져진 인간의 선택

스위벨 2014. 3. 27. 0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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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28 – 정유정 지음

: 극한 상황에 던져진 인간의 선택

 

 

화양, 불볕이란 뜻을 가진 도시. 그곳에서 처음 '빨간 눈' 환자가 발생한다. 개 번식업자의 집에서 개들이 죽고, 그 주인 남자도 의식을 잃은 채였다. 그 남자의 눈은 마치 피를 머금은 듯 새빨갛게 변해 있었다.

 

그리고 그와 접촉한 구급대원, 병원의 간호사와 의사를 시작으로, '빨간 눈'이라 불리는 전염병은 무섭게 퍼져나간다. 무엇이 원인인지 모르고, 치료 법도 없는 가운데, 한번 감염되면 무서운 속도로 사망에 이른다.

 

병은 점점 도시 전체를 휩싸며 퍼져나가고, 국가에서는 급기야 화양을 통제하기에 이른다. 현재 병에 걸리지 않은 건강한 사람들마저, 그 도시 안에 전염병과 함께 가두어 버린 것이다. 그리고 그와 함께 화양은 점점 끔찍한 악몽으로 변해간다.

 

 

인간, 짐승이 되다

 

작가는 그 극한의 생존 상황을 꾸미는데, 인간과 더불어 '개'라는 가장 친숙한 동물을 가져다 두었다. 일명 '빨간 눈'은 개와 사람이 함께 걸리는 '인수공통감염병'이다. 개와 사람이 동시에 걸리는, 동물과 인간에게 더 없이 평등한 전염병. 인간과 개는 그 안에서 똑같은 상황에 처했다.

 

그러자 사람들은 먼저 개들을 버렸다. 화양 안의 모든 개를 살처분하려고 했다. 방금 전까지 '반려견' 혹은 '가족'이라 불렀던 개들을 죽이고, 버린다. 그리고 개들은 살아남기 위해, 다시금 야생의 존재로 돌아서며 인간을 위협하기에 이른다.

 

평화로울 때의 인간은, 인간으로써의 존엄을 지키며 살아간다. 하지만 아수라장의 순간, 인간은 동물과 진배없어진다. 화양에는 병에 걸린 사람들과 더불어 건강한 사람들까지 갇히고 말았다. 그리고 그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인간들은 개를 살처분하듯, 끝내는 병에 걸린 사람들을 한 곳에 모아 감금한다.

 

 

 

무너진 드림랜드

 

'드림랜드'의 수의사 '재형'은 자신의 개들을 지키고 싶어한다. 그에게는 11년 전, 알래스카의 개썰매 경주에 나갔다가, 자신의 친구였던 썰매개들 '쉬차'를 모두 늑대에 잃은 경험이 있었다.

 

쉬차의 비명이 귀를 틀어 잡았다. 질끈, 눈을 감고 간절하게 바랐다. 쉬차가 사냥꾼을 끌고 달아나주기를, 자신이 삶을 확보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멀리

19시간 후. 재형은 스승 누콘의 손에 구조됐다. 마야가 그를 찾아냈다. 눈뜨고 가장 먼저 대면한 것 역시 마야의 다갈색 눈이었다. 무한한 신뢰와 애정이 담긴 눈이었다. 조심스레 물어오는 눈이었다.

"대장, 내 아이들을 어쨌어?"

자신을 신뢰했던 개 '마야'는 그 눈보라 속에서 재형을 찾아내느라 무리해서, 결국 죽음에 이르렀다. 하지만 재형은 그렇게 자신을 살려준 마야의 자식들, 그가 망설임 없이 친구라 불렀던 개들 '쉬차'를 버리고 홀로 살아남았다. 그 후 재형은 매일 밤 그때의 꿈을 꾼다.

 

그래서 재형이 만들어낸 '드림랜드'라는 공간은, 자신의 과거와 그 꿈 속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사죄를 하는 공간이었다. 그는 드림랜드에서 유기견을 돌보고, 비참한 환경에 처한 개들을 구조해 낸다.

 

재형은 다른 목숨을 제물로 살아남은 삶이 얼마나 버거운지를 알고 있다. 그래서 다시는 똑 같은 잘못을 저지르고 싶지 않다. 하지만 삶은 재형을 그날의 그 늑대 무리 앞으로 또 다시 밀어 넣었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이번에는 늑대의 날카로운 이빨이 아니라 사람들의 칼과 총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  

 

 

 

그럼에도, 존재하는 희망

 

책의 상황은 점점 혹독해진다. 굳이 그랬어야만 했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많은 수의, 죄 없는 이들이 죽어나간다. 마치 누군가가 "이래도, 이래도? 이래도 계속 인간으로 버텨볼래?" 하며 밀어붙이는 것 같기도 하다.

 

간호사인 수진은 매 순간 도망치고 싶어한다. 병원에 있다가는 언제 자신도 죽을 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는 그러지 않는다.

구급대원인 기준은 야생으로 변한 개에 부인을 잃었다. 그래서 개에 대해선 잔인하리만큼 냉정한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기준은 끝까지 구급대원 활동을 이어가며, 사람들을 구조한다.

수의사인 재형은 얼마든지 도망칠 수 있었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 그는 두려움에 벌벌 떨면서도, 끝까지 그 자리를 벗어나지 않는다.

 

극한 상황에 몰려 악마의 모습으로 변해가는 평범한 보통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수없이 갈등하면서도, 최대한의 힘을 그러모아 자신의 인간성을 지키려 애쓰는 사람들 또한 존재한다. 그래서 그런 그들의 모습은, 인간에 대한 희망을 포기하지 않게 한다.

 

◇◆◇

 

이야기는 총 6명의 시선을 통해 그려진다. 그 시선은 여러 사람들의 다양한 시각을 대변한다. 책은 꽤나 급박하게 변하는 상황을 차곡차곡 보여주고, 여러 명의 시선을 번갈아 사용하며 긴장을 놓지 않게 만든다. 그리고 생생하고 살아있는 묘사는,  마치 그 장면을 본 것처럼 느껴지게 만든다. 

 

모든 지옥의 시간이 마무리되어 갈 때쯤, 책에서 느껴지는 건 살아남은 자들의 기쁨이 아니다. 많은 죽음을 딛고 살아난 자들이 느끼는, 생명의 무거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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