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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 언어의 정원 - 눈부신 초록의 시간

스위벨 2013. 12. 17. 0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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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메이션] 언어의 정원 – 눈부신 초록의 시간  

/신카이 마코토 감독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전작 애니메이션, '초속 5센티미터'가 분홍색이었다면, 이번 작품은 눈부신 녹색이다.

초록빛이 감도는 한여름의 비는 싱그럽게 화면을 채웠고, 그 이미지를 보고 있노라면, 꼭 코 끝에서 상쾌한 향기가 맡아지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그 짙푸른 녹색의 한 가운데서, 그들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비의 인연

   

푸르름 절정에 다다른 여름, 그리고 장마의 계절. 빗방울이 하늘의 내음을 머금고 내려올 때, 그들의 푸릇푸릇한 인연도 시작된다.

 

비가 오는 날이면 1교시 수업을 땡땡이 치고 공원으로 오는 고등학생 타카오. 공원의 벤치에 혼자 앉아 맥주와 함께 초콜릿을 먹는 여자, 유키노. 청아한 여름 비가 내리는 날, 그들은 그렇게 만난다. 한 공원, 일본식 정원에서.

 

 

낯이 익은 듯한 얼굴 어디선가 보지 않았느냐고 타카오가 물어오자, 유키노는 타카오가 입은 교복을 보고는 혹시 봤을 지도 모르겠다고 답한다. 그리고 자리를 떠나면서 이런 시(단가)를 남긴다.

   

천둥소리가 저 멀리서 들려오고,

구름이 드리우고,

비라도 내리지 않을까.

그러면 널 붙잡을 수 있을 텐데.

(만엽집 )

 

 

 

 

달려가고 싶은 남자, 나아가지 못하는 여자

 

타카오 : 구두를 만드는 것이 꿈이다. 비가 오는 날이면, 학교를 땡땡이 치고 정원에 앉아 구두 스케치를 한다. 구두를 만들 가죽이며 부자재를 마련하기 위해 방학 때는 늘 아르바이트를 한다. 그는 더 빨리, 더 멀리 나아가고 싶다.

 

유키노 : 평일 낮, 직장에 가지도 않고 공원을 찾아온다. 미각을 잃어 맥주와 초콜릿 같은, 강한 맛밖에 느낄 수 없다. 그래서 혼자 공원에 앉아 초콜릿에 맥주를 마신다. 그녀는 나아갈 수 없게 되어 버렸다.

 

둘은 점점 친숙해지고, 타카오는 책을 선물해준 유키노에게 감사의 의미로 구두를 만들어 주기로 한다. 하지만 그러는 사이 비의 계절은 끝이 난다. 그러나 장마가 끝난 후에도, 유키노는 타카오를 기다린다. 그리고, 그녀에게 다가가고픈 마음은 타카오도 마찬가지다.

 

 

 

차가운 가을 비

   

 

   

어느 날, 학교에서 타카오는 유키노와 마주친다. 그리고는 유키노가 자신이 다니는 학교의 고전 선생님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놀란다. 유키노는 학교에 나오지 않고 있었고, 그 전에도 자신의 반을 직접 가르치는 선생님이 아니었기에 미처 몰랐던 것이다. 그리고 친구로부터 그녀가 '나아갈 수 없게 되어버린 이유'에 대해 듣게 된다.

 

비가 오지 않는 날인데도, 타카오는 다시 공원을 찾아온다. 그리고 이런 말을 건넨다.

   

천둥소리가 조그맣게 들리고,

비록 비가 내리지 않더라도

나는 여기에 남을 것입니다.

그대가 붙잡아 준다면.

(만엽집 )

 

이내 둘을 덮는 장대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그러나 9월에 내리는 비는 여름에 내리던 비와는 많이 다르다. 차갑고, 어둡다.

 

 

타카오는 자신의 마음을 고백한다. 좋아하고 있다고. 그의 말에 유키노의 뺨도 붉어진다. 그러나 어쩔 수가 없는 일이다. 예전에 우리나라 드라마 '로망스'에서 김하늘 쌤이 그랬듯, 유키노 또한 "난 선생이고, 넌 학생이야!"를 내뱉을 수밖에 없다.

 

 

 

발걸음을 떼는 여자, 멈춰 서서 기다리는 남자

   

타카오가 떠난 후, 유키노는 그와 함께 했던 정원에서의 일들을 떠올린다. 그리고 서둘러 뛰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녀가 뛰기 시작했을 때, 그는 그녀의 집 건물 계단참에서 걸음을 멈추고 서있다. 그렇게 둘은 서로의 속도를 조절함으로써 얼굴을 보고 마주 섰으나, 쉽사리 다가설 수는 없다.  

 

 

그가 먼저 소리치기 시작한다. 자기가 그 학교 학생인 것을 알면서 왜 말을 안 했느냐고. 아무것도 모르는 자신을 보는 게 재미있었느냐고. 구두를, 유키노를 동경하는 자신을 보면서 절대 닿을 수 없을 거라 생각하지 않았느냐고. 그렇게 당신은 늘 도망만 치고 혼자서 살아갈 거냐고.

   

그의 말에 그녀는 눈물을 흘린다. 그리고 망설임 끝에 드디어 달려가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그의 품에 안긴다.

   

"아침마다 정장을 차려 입고 학교에 가려고 했어. 하지만 무서워서…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어. 그곳에서 나, 너에게 구원받은 거야."

   

드디어 그녀는 발걸음을 떼기 시작했다.

 

 

 

비가 이렇게 예쁠 수도 있구나, 하고 영화를 보는 내내 감탄했다.  50분이 채 되지 않을 정도의 짧은 길이의 애니메이션이지만, 그 여운만은 결코 짧지 않다. 장마의 계절인 여름이 찾아오면, 다시 이 초록빛 화면이 그리워 질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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