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장 사이의 망상/문학, 소설, 기타

[소설] 높고 푸른 사다리 - 공지영

스위벨 2014. 1. 17.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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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높고 푸른 사다리 – 공지영

 

 

어떤 책들은, 다소 시간을 두고 늦게 읽히는 것들이 있다. 나의 경우, 그것은 재미의 여부와는 상관 없이, 그 글이 주는 마음의 무게에 따라 달라진다.

 

무게가 그리 크지 않은 것들은 쑥쑥 읽혀나가며, 감상도 술술 잘 써진다. 반면에, 그 글이 담고 있는 의미가 나에게 묵직하게 다가올수록 책장은 더 천천히 넘어가게 되고, 그 후에 책에 대한 감상을 쓰기 전에도 많은 망설임을 주곤 한다. 그리고 공지영의 '높고 푸른 사다리'는 나에게 그런 책이었다.

 

나는 책을 읽는 속도가 다소 빠르고, 그래서 간혹 무언가를 빼먹는, 덜렁거리고 성급한 독자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책은 거의 일주일 정도를 잡고 있었다. 빨리 읽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서둘러 읽고 싶다고 생각했다. 다음 이야기가 몹시 궁금했다. 하지만 매번, 이어지는 책장을 잡고 앉기 전에 항상 두려웠다. 책이 하는 이야기의 무게와, 그럼에도 그 책이 하는 이야기를 하나도 빠짐 없이 오롯이 읽어내고 싶다는 나의 욕심이 말이다.

 

 

◇◆◇

 

 

베네딕도 수도원의 한 젊은 수사 '요한'이 주인공이다. 그는 신에게 자신을 바치기로 마음 먹고, 수도원에 들어간다. 그는 꽤나 착실하고, 열심인 수도사였다. 하느님이 뜻하는 바에 순명 하려고 했고, 평생 그 길에 자신을 바치고자 했고, 그를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 곧 신부가 되는 사제서품을 앞두고 있다.

그러나 한 손님의 등장과 함께, 그의 삶은 전혀 다른 곳으로 향한다. 소희. 그는 소설 속에서 내내 그녀의 이름을 참 조심스럽고도 소중하게 불렀다. 그리고 이내 그녀를 사랑하게 되었다. 평생 자신이 사랑하겠다고 맹세한, 십자가 위의 그 예수님보다 말이다. 요한은 고민하고 번뇌한다. 그리고 결국 소희와 함께하는 인생을 택하려고 한다.

 

하지만 역시 삶은 뜻대로 되어주지 않는다. 신은 그를 놀리기라도 하듯, 그가 가장 소중하다 생각했던 것들을 하나씩 빼앗아 간다. 그것도 가장 비참하고 고약한 형태로 말이다. 그 오랜 수련 기간 동안 신의 뜻에 순명 하겠다는 기도를 하루도 빠짐없이 바치고, 모든 신의 행위를 믿어 의심치 않았던 그였지만, 도저히 더는 그럴 수가 없었다. 도대체 왜, 무엇 때문이냐고! 무엇 때문에 이렇게까지 하는 것이냐고 신을 향해 따지지 않고서는, 제대로 서 있을 수 조차 없었다. 그는 그렇게 지옥과도 같은 고통 속으로 떨어졌고, 자신의 신을 원망한다.

 

 

◇◆◇

 

 

무척이나 종교적 색채가 강하다고 느낄 수 밖에 없는 책이다. 천주교 수도원의 수사가 주인공이니 어쩔 수 없다. 하지만 단지 종교의 이야기만은 아니다. 모든 종교는 모두 사람의 삶을 이야기한다. '인간'이 인간답게 사는 것, 그것이 바로 종교가 추구하는 가치다. 그러므로 이 책도 당연히 사람에 관한 이야기이며, 삶에 관한 이야기다.

 

요한의 할머니는, 고통에 몸부림치는 손자를 위해 평생 가슴에 묻고 산 이야기를 꺼내놓기 시작한다. 그건 바로 그녀가 겪은 6.25전쟁 이야기였다.

전쟁이 무서운 건, 누구나 살인자가 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전쟁이 벌어지면 누구나 서슴없이 살인자가 되고, 누구나 피해자이면서, 동시에 자신보다 약한 자를 괴롭히는 가해자가 된다고. 그리고 이어, 그녀는 막연한 전쟁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살아야 했던 사람들을 이야기한다. 어느 먼 나라의 이야기에나 나올 것 같은 그 끔찍한 전쟁 속에서, 바로 우리의 할머니, 우리의 할아버지가 실제로 겪었던 삶의 이야기를 말이다.

 

인간은 그렇게 너무도 연약하고, 자기중심적이며, 짐승의 본능을 가진 존재다. 전쟁이라는 그 참혹하고, 분노와 악의로 가득한 상황은 인간이 얼마나 비루한 존재인지를 낱낱이 깨닫게 한다. 그리고 그런 인간은 끔찍하기만 하다.

그러나 동시에, 그런 고통과 슬픔, 비참함은, 그런 상황 속에서도 인간이 얼마나 고귀한 존재로 남을 수 있는지를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그 비명과 아우성의 순간, 인간은 얼마나 빛날 수 있는지를 말이다.

 

가장 신과 가깝게 서 있다 생각했던 성직자조차 그 많은 갈등과 번민에 괴로워하고, 고통에 떤다. 그리고 그렇게 만든 신을 원망한다. 그러나 결국 요한은 할머니의 이야기로부터, 그리고 죽음을 앞둔 한 외국 수사의 이야기로부터, 그리고 그 이야기에서 발견한 놀라운 기적으로부터, '높고 푸른 사다리'를 깨닫는다. 가장 비참하고 어지러운 순간, 참혹한 그 아수라장의 순간… 하늘로부터 내려온 듯한, 높고 푸른 사다리.

 

 

책에 등장한, 6.25전쟁 중에 벌어진 기적같은 이야기는 실제로 사실이라고 한다. 사실 소설이라해도 너무 과한 설정이었다고, 작가에게 너무 욕심을 냈다며 삐딱하게 웃어 넘겼을 그 일이, 실제로 벌어진 사실이라는 걸 알고는 한동안 목이 탁 막혀 왔다. 그리고 책의 제목이기도 한 '높고 푸른 사다리' 를 입 안에서 조심스럽게 굴려 몇 차례 웅얼거려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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