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왕국 – 요시모토 바나나
요시모토 바나나의 소설, 왕국이다. 은은한 파스텔 색상의 표지에 선인장 그림이 참 예쁘다. 3권으로 이루어져 있으나, 분량은 그리 많지 않다. 한 권 한 권의 책이 상당히 얇다. 그러나 요시모토 바나나답게, 그 안에 담긴 내용은 결코 얄팍하지 않다.
이어지는 하나의 내용이지만, 각 권마다 가진 제목이 따로 있다. 1권은 [안드로메다 하이츠], 2권은 [아픔, 잃어버린 것의 그림자 그리고 마법], 그리고 3권은 [비밀의 화원]이라는 제목을 가지고 있다.
주인공 시즈쿠이시는 산 속에서 할머니와 단 둘이 살아간다. 할머니는 약초학에 대해 훤히 꿰뚫고 있고, 약초와 산의 기운을 바탕으로 사람들을 치유해주는 일을 한다. 시즈쿠이시도 그런 할머니 밑에서 배우며, 자연의 기운을 그대로 느낄 줄 아는 사람으로 자라난다.
그런데 그들이 살던 산이 개발되면서 시즈쿠이시와 할머니는 산을 떠나야 할 상황에 이른다. 할머니는 또 다른 삶을 찾아 해외로 떠나고, 시즈쿠이시는 도시로 나와 홀로서기를 시작한다.
시즈쿠이시는 맹인 점술가 가에데를 만난다. 그는 비록 눈은 보이지 않지만, 본능적으로 사람들의 '기운'을 느낀다. 조금 특이한 존재이지만, 그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존재가 되고 싶어하고, 그렇게 살려고 노력한다. 시즈쿠이시는 곧 그에게 호감과 인간적인 존경을 느끼고 그와 함께 일하게 된다. 시즈쿠이시가 할머니에게 배운 것들이 가에데의 일에도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점술가 가에데에게는 동성 연인 '가타오카'가 있다. 그는 가에데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의 사람이다. 그래서 시즈쿠이시에게 어깃장을 놓기도 하고, 가에데와 가까이 있는 시즈쿠이시에게 반감을 표현하기도 한다.
그러나 시즈쿠이시에게도 다른 연인이 있다. 선인장을 사랑하는 '신이치로'다. '식물'이라는 공통분모가 시즈쿠이시와 신이치로를 연인으로 만들어 주었다.
그러나 삶은 시즈쿠이시가 바라는 데로 흘러가지 않는다. 마약 중독자가 지른 불에 시즈쿠이시의 집과, 그녀가 소중히 여기던 선인장들이 모두 타버리는가 하면, 의지하던 가에데가 외국으로 잠시 떠나면서 시즈쿠이시는 한 없는 외로움을 겪기도 한다. 그리고 사랑했던 '신이치로'와도 헤어지고 만다.
시즈쿠이시는 산에서 살던 인물이다. 예민하고, 순수하고, '기'라고 표현되는, 인간의 본능적인 면을 느낄 줄 아는 사람이다. 그런 인물이 도시에 홀로 나왔다. 시즈쿠이시는 여러 사람을 만나고, 부딪치고, 산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인간의 여러 면모를 맞닥뜨리게 된다.
그녀는 가에데와의 사이에서 겪는 감정의 혼란도, 가타오카와 겪는 인간과의 갈등도, 그리고 '신이치로'와 함께한 사랑과 실연의 아픔도, 오롯이 겪어낸다. 그리고 그 감정들을 바탕으로 더 큰 것을 깨닫고, 앞으로의 삶에 희망을 가지게 된다.
한 인물의 성장기라고 생각한다. 더 없이 순수한, 자연인 시즈쿠이시. 그녀가 도시로 나오는 순간은, 아이가 조금씩 세상을 알아가는 과정과도 닮아 있다. 그녀는 타인과 함께 사는 것을 배우고, 그들 사이의 갈등에 아프다. 그럼에도 거기서 멈추어서는 안 된다. 할머니의 가르침과 주변 사람들의 도움으로, 시즈쿠이시는 자신의 아픔을 스스로 치유해 나간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는 희망을 이야기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은 나와 가에데를 둘러싼, 길고 이렇다 할 재미도 없는 이야기의 시작이다. 동화보다 유치하고, 우화라 하기에는 교훈이 없다. 어리석은 인간의 삶과, 약간 묘한 각도에서 바라본 이 세계. 결국은 좀 삐딱한 옛이야기다. 그래도 그런 이야기 속에 아주 사소하지만 좋은 것이 있다. 그리고 정말 그렇게밖에 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는 세계가 신기하게도 가슴을 열어 준다. – 본문 중에서
다른 요시모토 바나나의 책들처럼, 이야기는 잔잔하게 흘러간다. 급격한 변화와 혼란으로 감정을 요동치게 만들 수 있는 장면에서도, 작가는 그런 길을 가도록 하지 않는다. 가장 큰 물결 앞에서도, 조금씩 문을 열어 살짝 흘려 보낸다.
아마 작가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삶의 대한 치유와, 긍정, 그리고 그를 넘어서는 희망이기 때문일 것이다. 자신의 의지가 아닌 주변의 것들에 휘둘려 내 삶을 요동치게 하지 말고, 그저 아픔도 삶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이고, 자기 자신을 조금 더 소중히 여겨 주었으면 하는 그런 바람에서이지 않을까 싶다.
내가 20살 초반 무렵에는 요시모토 바나나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의 책을 두어 권 접하고는, 별 감흥이 없어 그 뒤로 그녀의 책을 별로 찾지 않았다. 그런데 20대 후반 어느 날, 요시모토 바나나의 명성에 힘입어 다시 찾아 든 책을 읽고, 나는 적잖은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녀가 왜 그렇게 유명한 작가로 입지를 굳혔는지 알 것 같았다. 그리고 30대 중반을 향해 달려가는 지금, 그녀의 이야기를 조금은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된 것 같다.
삶이 자신에게 웃고 있는 것 같고, 모든 일을 노력하면 이룰 수 있을 것 같은, 그런 자신만만한 날을 살고 있는 이들에게는 이 책이 그리 와 닿지 않을 거란 생각이다. 그보다는 누군가의 위로가 필요한 이들에게, 그리고 마음 어딘가의 상처가 자꾸만 들쑤셔 지는 이들에게, 조용히 건네고픈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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