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2월 30일생 - 존재할 수 없는 날 태어난 여인 (김서진 지음)

[책, 도서] 2월 30일생

/ 김서진 지음

존재할 수 없는 날, 2월 30일에 태어난 여인.

그리고 25년의 시차를 두고 같은 장소에서 죽은 두 여자.

 

 

    줄거리, 내용    

 

방송국에서 PD로 일하는 '현재'. 그의 할아버지는 J시의 지역 유지로, 독립투사 집안에서 태어나 온갖 현대사의 고초를 겪고 살아나 집안을 일으킨 전설적인 인물이다. 그런 그의 아들이자 '현재'의 아버지는 그런 할아버지의 뜻을 받아 선거 출마를 앞두고 있다.

  

고향에 다니러 온 현재는 우연히 '혜린'을 목격한다. 혜린은 현재와 불륜관계에 있던 여자였는데, 얼마 전 아내에게 들킨 후 그녀와는 이별했다. 때문에 혜린이 나타나자, 현재는 그녀가 앙심을 품고 자신의 고향까지 찾아왔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혜린을 뒤쫓아가 그녀에게 잔뜩 화를 내며 퍼부어대고는, 술에 취한 채로 귀가한다.

 

그로부터 일주일 후, 혜린은 강변에서 주검으로 발견된다. 현재와 만났던 그날 밤, 혜린은 살해되었던 것. 그 때문에 '현재'는 살인 용의자로 체포된다. 현재는 결백을 주장하지만, 마음 한구석에 두려움도 있다. 그날 밤 현재는 술을 마신 채 필름이 끊겼고, 혜린과의 마지막을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얼마 후 현재는 풀려나지만, 세간에서는 지역유지인 할아버지의 힘으로 풀려난 것이라 수군대고, 현재 스스로도 사건에 대해 납득할 수 없는 일들이 있다. 그 때문에 현재는 혜린의 죽기 전 행적을 뒤쫓고,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된다.

25년 전, 혜린이 죽었던 바로 그 장소에서 '만리'라는 여자가 죽었고, 혜린은 죽기 전 J시에서 그 여자에 대해 알아보고 다녔던 것이다. 기억나지 않는 그날 밤, 자신은 정말 살인 사건과 무관한 것일까? 혜린은 왜 J시에 나타나 25년전 죽은 여자에 대해 조사했을까?

  

 

◇◆◇

 

소설 2월 30일생은 한 여자의 죽음에서부터 시작한다. 그것도 불륜관계에 있던 남자가 유력한 용의자인 상황이다. 낡은 치정 미스터리 드라마 같은 시작이다. 그런데 소설은 흔한 첫인상과 달리 전혀 다른 얼굴로 그 면적을 넓혀간다.

 

2월 30일이라는, 존재하지 않는 날 태어난 여자의 죽음과 관련된 미스터리는, 곧 한 집안의 어두운 비밀을 관통하고, 이윽고 독립운동이나 6.25 전쟁과 보도연맹학살사건 같은 굵직한 현대사의 비극을 포함한다.

  

 

소설 2월 30일생 속 주인공 남자의 이름은 '현재'다. 그의 여동생의 이름은 '미래'. 그리고 그들은 자라오면서 이런 우스갯소리를 하곤 했다. 어디서 '과거'라는 이름을 가진 동생이 하나 튀어나오는 것 아니냐고.

그런데 정말 나타났다 '과거'라는 이름이 붙은, '혜린'이. 그녀는 누군가 숨기고 싶었던 '과거'를 결국 '현재'로 떠오르게 했다.

 

"나는 마치 신기한 부적을 보는 사람처럼 급여 서류에 적힌 혜린의 생일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2월 30일생. 존재하지 않는 날짜. 결코 올 수 없는 내일. 혜린의 존재는 어디서 시작된 것일까."

 

모든 흔적을 지우려 애썼음에도 숨길 수 없던 개인의 과거와 역사. 목격자와 증인인 이들을 다 죽이면서까지 없앴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없앨 수 없던, 떼어낼 수 없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는 그렇게 맞닿았고, 서로를 알아버렸다.

 

(결말에 대한 스포일러가 될 수 있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책이 가진 가장 큰 약점은, 이런 골자의 이야기가 이미 여러 형태로 소비된 바 있다는 사실이 아닐까. 몇 차례 이 소설과 비슷한 비밀을 풀어낸 작품을 만나보았다. 우리나라 드라마와 책도 있었고, 외국의 소설 책도 있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친일파의 신분세탁이라면, 외국에선 주로 나치 전범의 신분세탁으로 등장한다. 그 중에서도 가장 또렷하게 기억하는 우리나라의 드라마 한 편은 '상어'였다. 손예진과 김남길이 주연이었던 드라마.)

 

그래서 나는 소설 '2월 30일생'의 초반, 머슴 '이대길'이란 이름이 언급되자마자, 결말을 알아버렸다. 무언가 큰 비밀을 숨기고 그것을 하나씩 알아가야 하는 미스터리에서, 독자에게 초반부터 명확히 그 진상이 보이고 결말이 보인다는 것은 분명 큰 약점이다.

(물론 이런 류의 이야기를 접하지 않은 독자라면, 나보다 만족감이 몇 배는 클 듯하다. 내 지인은 이 책의 소재에 대해 아주 충격적이고도 흥미로운 이야기라 평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설 2월 30일생은 참 매력적인 책이었다. 책 속에서 인물이 숨긴 큰 비밀 한 가지가 비슷한 종류일 뿐, 그밖에 인물이나 세부 사항, 전개 양상은 여타의 작품들과 명확히 다르다. 확실히 소설 '2월 30일생'은 그 만의 독창성을 내뿜고 있다. 작가가 창조해낸 특유의 인물들과, 그 인물이 얽혀진 인연, 그들이 만들어낸 비극, 그리고 그 모든 것에서 나오는 긴장감과 문장의 흡인력.

그래서 책은 분명 흥미롭고 매력적이다. 결말과 비밀을 초반에 눈치챘음에도, 책을 펼친 그 자리에서 끝까지 다 읽어 내릴 수 밖에 없을 정도로.

 

"나에게 가장 큰 잘못이 있다면, 지난날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다는 것이다. 그건 내 잘못이 아니라고 나를 대신해 변명해줄 사람도 있겠지만 아니다. 내 잘못이다. 가능하든 가능하지 않든 나는 내가 왔던 곳과 나를 이 세상으로 오게 만든 것에 대해 알았어야 했다. 저 먼 우주의 별들처럼 몰랐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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