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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안경 – 삶을 찬찬히 들여다 볼 시간

스위벨 2013. 12. 4. 1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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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슬로우 라이프 무비, 안경

: 오기가미 나오코 감독/ 고바야시 사토미, 이치카와 미카코, 카세 료 출연

 

 

아름다운 바닷가, 이상한 사람들

 

휴대폰이 터지지 않는 장소에 가고 싶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무거운 짐가방을 끌고 이 마을을 찾아온 '타에코(고바야시 사토미)'. 그녀는 '유지'의 민박집에 묵게 된다. 아름다운 바다가 펼쳐지는 한가로운 마을이지만, 타에코에게 이 마을 사람들은 모두 어딘가 이상하기만 하다.

 

마을에서 음악소리가 들려 따라가 보니, 해변에서는 마을사람들이 '사쿠라'씨의 시범에 맞추어 아침 체조를 하고 있다. 이 체조는 '사쿠라'씨가 직접 만든 것으로, 이름은 "메르시 체조"란다. 에메랄드 빛 바다가 펼쳐진 곳에서, 여럿이 함께하는 우스꽝스러운 동작이, 발랄한 음악에 맞추어 이어진다.

 

그러나 타에코는 이러한 상황이 도무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여럿이 한 식탁에 둘러앉아 같이 먹는 밥도, 자신에게 친근하게 구는듯한 태도도. 그리고 아침마다 사쿠라씨가 자기 방에 마음대로 들어와, 눈을 뜨자마자 건네는 아침 인사도. 그래서 그녀는 유지의 민박집을 떠난다.

 

 

 

자전거를 태워준다는 것

 

호기롭게 민박집을 나왔으나, 작은 마을에 묵을 곳이 많을 리가 없다. 다른 곳을 찾아갔는데, 그곳은 더욱 당황스럽기만 하다. 타에코는 기겁을 하며 그곳에서 도망쳐 나오지만, 차도 없고, 휴대폰도 터지지 않는 마을이다. 커다란 가방을 끌며 터덜터덜 걸어봐도, 도무지 자기가 서 있는 곳이 어디인지조차 알 수가 없다.


 

그때, 저 멀리서 자전거를 타고 달려오는 사쿠라씨의 모습이 보인다. 그녀의 늠름한 모습은 지칠대로 지친 타에코에게는 마치 구원 같다. 자신의 짐가방을 끌고 자전거를 뒷자리에 앉으려는 타에코에게 인상을 팍 써 주는 사쿠라씨. 그 표정에 기가 눌린 타에코는 결국 자신의 짐가방을 길 위에 버린 채로 사쿠라씨의 자전거 뒤에 오른다. 그렇게, 그녀는 자기가 끌고 다니던 지나치게 크고 무거운 짐가방에게 작별을 고한다.  

 

사쿠라씨가 자전거 뒤에 타에코(고바야시 사토미)를 태워주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하루나(이치카와 미카코)'도, '오묘기(카세 료)'도 "부럽다"고 말한다. 그런 두 사람의 반응에, 타에코는 갑자기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두 사람 사이를 능청스럽게 거닌다.

 

 

자전거 뒤에 탄다는 게 과연 뭐길래?

 

자전거 뒤에 누군가를 태운 다는 건, 그 사람의 무게를 온전히 자신이 지는 것을 말한다. 그 사람의 무게를 오롯이 느끼면서, 내 발로 페달을 밟아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누군가의 자전거 뒤에 탄다는 건, 내 무게를 온전히 맡기는 것, 그리고 그 사람이 이끄는 방향을 믿고 따르는 것이다.

하루나도, 오묘기도, 사쿠라씨에게 자신을 내맡기고, 긴밀히 연결되어 의지하면서 그녀의 방향을 따라 가보고 싶었던 건 아닐까?

 

 

 

달콤한 팥빙수의 황홀한 가격

 

해변에 작게 자리잡은 사쿠라 아줌마의 팥빙수 가게.

팥빙수 가격이 얼마냐고 묻는 타에코를 사쿠라 아줌마와 하루나, 유지가 이상한 표정으로 쳐다본다. 그리고 사쿠라 아줌마가 천천히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낸다. 돼지 얼굴 모양의 종이접기다.

 

"아까 꼬마 아이는 이걸 팥빙수 값으로 냈습니다만."

 

사쿠라 아줌마의 빙수 가게에서는 빙수 값을 돈으로 받지 않는다. 꼬마 아가씨는 자신이 만든 종이접기를, 누군가는 빙수에 필요한 얼음을, 또 다른 이는 신선한 채소를 빙수 값으로 지불한다.

 

그러나 타에코에게는 난감한 일이다. 돈이 아닌 다른 것으로 무언가의 가치를 재는 건 익숙하지 않다. 어리둥절한 타에코는 하루나와 유지에게 당신들은무엇으로 빙수 값을 지불하느냐고 묻는다. 

그들은 대답한다. "만돌린"

그리고 청명한  오후의 바다를 바로 앞에 두고, 작은 만돌린 연주회가 시작된다.


 

 

 

 

 

그들이 사는 세상

 

처음 이 마을에 왔을 때, 타에코는 이런 질문을 했다. 이 마을에 오는 사람들은 도대체 무엇을 하러 오느냐고. 관광지도 없고, 휴대전화도 터지지 않고, 하물며 버스마저 없는 듯 보이는 마을. 마치 다른 시간을 흐르는 것 같은 장소에. 그 물음에 주로 '사색'을 하러 온다는 하루나와 유지는 대답한다.

그러나 그녀는사색을 해본 적도, 소질도 없다. 그래서 타에코는 털실을 사서 뜨개질을 시작한다. 바닷가에 편안하게 앉아서. 그리고 그것을 시작으로, 타에코는 천천히 이 마을의 시간에 젖어 들기 시작한다.


 

팥을 삶는 사쿠라 아줌마는 말한다. 유심히 보는 것, 그리고 가만히 기다리는 것. 그리하여 때가 되었을 때를 알아채고, 그 때를 맞추어 불을 끄는 것이 중요하다고. 그녀의 말을 타에코도 이제 조금은 알 것 같다.


그리고 우스꽝스럽다고 여겼던 메르시 체조도 마을 사람들과 함께 하기 시작한다. 메르시(merci)는 불어로 "감사하다"는 뜻이다. 다함께 모여 감사한 마음으로, 하루를 시작하는 체조인 것이다.

 

타에코는 매실장아찌 한 알 속에 들어 있는 소박한 기원의 마음도 이해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쭉 가다가 마음이 불안할 때쯤에서 조금 더 가서 우회전' 같이 애매모호하게 표현된, 유지의 지도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보는 것과 잘 보는 것

 

이 영화의 제목이 "안경"인 것에 대해서 '오기가미 나오코' 감독은, 등장인물 모두가 안경을 쓰고 있기 때문, 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하지만 딱 그 이유만은 아닌 게 확실하다. 결국 "보는 것"에 대해 말하고 싶었던 것이리라.

 

영화의 마지막 부분, 그 마을에서 떠나는 타에코는 차창을 내리고 바람을 느끼면서 쓰고 있던 안경을 벗어 든다. 그리고 그 순간, 안경은 바람에 날아간다. 타에코는 잠시 놀라지만, 이내 아무 일도 없었던 듯이 웃음을 짓는다.

 

 

안경이 없이도 타에코는 여전히 기분 좋은 바람을 느끼고 있다. 짭짤한 바다 내음을 맡을 수 있다. 굳이 돈으로 계산하지 않아도 다른 무언가로 빙수값을 지불할 수 있고, 몇 Km의 수치로 표시하지 않아도 유지가 지도를 통해 표현하려고 했던 바를 이해할 수 있다.

 

굳이 안경을 쓰고 사물의 외관을 세세히 보는 것만이 잘 보는 것이 아니라, 오감을 통해, 마음을 통해, 누군가에 대한 이해를 통해 그 속을 "잘 보는 것"임을 말하고 싶었던 것이라 생각한다.

 

 

내용도 물론 마음에 들었지만, 영화 내내 펼쳐지는 맑은 에메랄드 빛 바다만으로도 충분히 휴식이 되는 영화였다. 맑은 태양이 내리쬐는 날, 그런 아름다운 해변에 앉아 문득 사색을 하고 싶어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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