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책] 새의 선물
: 삶의 악의를 대하는 방어적 시선, 냉소
/ 은희경 지음
작가 '은희경' 하면 맨 처음 떠오르는 단어는 바로 '냉소'다. 그리고 이 책은 작가에게 붙은 그 대표적 수식어를 가장 명료하게 보여주는 소설이 아닌가 싶다. 또한 은희경 작가의 작품 중에,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소설이기도 하다.
12살 소녀, 진희의 시선
12살 이후 나는 성장할 필요가 없었다, 를 당당하게 외치는 12살 소녀 진희. 그녀는 그 나이 또래의 어린아이에게 걸맞지 않은 시선으로 삶을 바라본다.
어른들이 자신에게 친절히 대해주는 것은 자신이 그들의 비밀을 알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진희는 이웃집 어른들이 감추고 있는 그들만의 내면을 곧잘 눈치채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른들이 이상하게 여기지 않을 만큼 순진하게 행동하고, 어른들이 원하는 딱 그만큼만 자신의 영민함을 내보인다. 그리고 아직 세상을 모르는 자신 또래의 아이들을 교묘하게 조종해 자기가 원하는 결과를 이끌어 내기도 한다.
소설은 그런 진희의 시선을 통해 갖가지 군상의 인물을 그린다. 철 없는 이모와, 홀로 아이를 키우는 장군이 엄마, 그 집에 하숙하는 국민학교 선생님, 매일 남편에게 맞고 사는 광진테라 아줌마 등등. 진희는 그들의 다소 지질하고 끈적거리는 속내를 간파하고, 그들의 모습을 관찰한다. 물론 겉으로는 더 없이 천진난만한 아이의 모습을 하고 말이다.
냉소, 상처받지 않기 위한 방어적 태도
하지만 책을 읽다 보면 느끼게 된다. 진희가 냉소의 시선을 유지하는 것, 끊임 없이 '보여지는 나'와 '바라보는 나'를 분리해 가며 삶을 대하는 태도, 싫은 것을 더욱 냉혹하게 자신의 의식 속으로 가져와 기어이 나름의 극복을 해내는 과정. 그것은 소녀 진희가 더 이상 상처받기 싫어서 행하는, 일종의 처절한 몸부림이다.
"내가 왜 일찍부터 삶의 이면을 보기 시작했는가. 그것은 내 삶이 시작부터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삶이란 것을 의식할 만큼 성장하자 나는 당황했다. 내가 딛고 선 출발선은 아주 불리한 위치였다. 더구나 그 호의적이지 않은 삶은 내가 빨리 존재의 불리함을 깨닫고 거기에 대비해주기를 흥미롭게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어차피 호의적이지 않은 내 삶에 집착하면 할수록 상처의 내압을 견디지 못하리란 것을 알았다. 아마 그때부터 내 삶을 거리 밖에 두고 미심쩍은 눈으로 그 이면을 엿보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다 보니 나의 삶의 비밀에 빨리 다가가게 되었다."
어렸을 때 정신이 병든 엄마는 자신을 기둥에 묶어두고 집을 나가버렸고, 죽었다. 진희는 할머니가 데려와 할머니 손에 자랐다. 아버지라는 존재는 알지도 못한다. 할머니가 자신을 귀하게 키워주었으나, 최악의 경우 할머니는 이모와 자신 중에 결국 이모를 선택할 거라는 막연한 두려움도 있다. 기억나는지 안 나는지조차 모호할 정도로 어린 나이에 겪어야 했던 그 모든 일들이, 진희를 조숙하게 만들었고, 삶에 거리를 두게 만들었다.
삶은 농담, 그러나...
"삶도 그런 것이다. 어이없고 하찮은 우연이 삶을 이끌어간다. 그러니 뜻을 캐내려고 애쓰지 마라. 삶은 농담인 것이다."
소설은 끝까지 그 냉소를 유지한다. 진희는 '12살 이후 성장할 필요가 없었다'고 말했던 것처럼 성인이 되어서도 그 시절의 태도를 가진다. 12살 이후 성장할 필요가 없었던 진희는, 바꾸어 말하자면 12살 이후에 하나도 성장하지 못한 것이다.
진희에게 삶이란 별다른 이유 없이 어이없는 일들을 던지는 존재다. 그래서 언제 어디서 또 삶이 자신에게 어이없는 농담을 던져도, 거리를 유지하고 있어야 상처받지 않을 수 있다. 그래서 그녀는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도, 자기 자신을 온전히 삶 속으로 내던지는 것도 하지 못한다. 진희는 결국 자신에게 조롱만을 던지는 삶에 상처받지 않는 척 냉소하느라, 끝내 자신의 삶을 그렇게 건조하고 차게 만들어 버린 건 아닐까. 하지만 그럼에도 그런 그녀를 이해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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